[Classic in Cinema] (19) 영화 <마농의 샘> 속 베르디 오페라 <운명의 힘>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연민 느껴져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정해진 운명을 갖고 태어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아등바등 살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이미 정해진 운명대로 될 테니까. 자기 삶이 뜻하는 대로 풀리지 않을 때, 우리는 흔히 "운명이야" 이렇게 얘기한다. 이 말에는 운명이란 인간의 의지 너머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힘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운명은 힘이 세다.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절대로 빠져나갈 수가 없다. 클로드 베리 감독의 영화 <마농의 샘>은 그렇게 가혹한 운명의 힘에 관한 영화다.

죽은 아버지로부터 고향 땅을 물려받은 쟝은 아내, 그리고 어린 딸 마농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와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하지만 계속되는 가뭄으로 물이 마르면서 농사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데 사실 그의 땅에는 농사에 필요한 물을 무한정 공급해 줄 수 있는 샘이 있었다.

마을에 사는 젊은이 위골랭과 그의 큰아버지 수메랑은 이 사실을 쟝이 고향에 내려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기들이 땅을 차지할 욕심에 그 샘을 땅주인 몰래 막아버렸고, 이 사실을 모르는 쟝은 우물을 파려고 다이너마이트로 암벽을 폭파하다가 그만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만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운명론적으로 얘기하자면 쟝은 어차피 죽을 운명이다. 곱추인 그가 아내, 딸과 함께 고향에 도착한 바로 그 순간에도 그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쟝과 아내는 앞으로 자기들이 살아갈 허름한 농가의 2층 창가에서 꿈같이 아름다운 프로방스의 농촌 풍경을 바라본다. 완벽하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순간. 이 순간을 그냥 보내기 아쉬웠는지 쟝이 하모니카를 가져와 아름다운 멜로디를 연주한다.

여기서 그가 연주하는 멜로디는 베르디의 오페라 <운명의 힘>의 주제선율이다. 남편의 하모니카 연주에 맞추어 그의 아내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닥쳐올 운명이 너무 가혹하기 때문일까. 그 광경이 그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울 수가 없다.

쟝이 죽자 위골랭과 수메랑은 그동안 자기들이 막아놓았던 샘을 다시 튼다. 그런데 바로 이 광경을 쟝의 어린 딸 마농이 보게 된다.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 마농은 성인이 된 다음 두 사람을 상대로 복수극을 벌이는데, 사실 이후의 이야기는 구태의연하기 그지없다. 프랑스 영화답지 않게 너무나 뻔한 인과응보의 공식을 밟는다. 쟝의 딸 마농을 사랑하게 된 위골랭은 자살하고, 위골랭과 함께 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수메랑은 쟝이 바로 자신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진실을 알게 된 수메랑은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며 생을 마감한다.

이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쓰인 베르디의 <운명의 힘> 역시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쳐 보았자 결코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칼라트라바 후작의 딸 레오노라는 알바로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딸이 알바로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고, 그래서 두 사람은 아버지 몰래 도망칠 계획을 세운다. 두 사람이 도망치려는 순간 후작이 들어오고, 세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알바로가 실수로 후작을 죽이고 만다.

아버지의 죽음에 분노한 레오노라의 오빠 돈 카를로스는 원수를 갚기 위해 알바로를 찾아 나서고 마침내 알바로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알바로는 돈 카를로스에게 용서를 구하지만 카를로스는 알바로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래서 두 사람은 결투를 벌이게 된다. 여기에서 알바로는 레오노라의 오빠 돈 카를로스를 죽이고, 이어서 레오노라마저 죽인다. 주인공의 죽음으로 끝나는 참담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베르디의 <운명의 힘>은 막이 오르기 전에 연주하는 서곡에서부터 운명의 가혹한 힘을 보여준다. 이것을 듣고 있으면 운명 앞에 무방비 상태로 서 있는 인간의 모습이 그려진다. 금관악기의 당당한 울림으로 시작하는 서곡은 처음부터 가혹하게 인간을 몰아붙인다.

인간은 때로는 저항하고, 때로는 호소하고, 때로는 발버둥치지만 운명의 가혹한 타격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결국 항복하고 만다. 바로 이 순간 어디선가 홀연히 들려오는 플루트와 오보에 소리. 영화에서 쟝이 고향 집 2층 창가에서 불던 바로 그 소리이다. 그 아련한 멜로디에서 운명의 가혹한 힘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 느껴진다.



글 진회숙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