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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패러다임에 갇힌 새 시대의 랜드마크

[미디어아트프리즘] 애니쉬 커푸어의 런던올림픽 기념탑
디지털 매체 활용한 새로운 디자인의 가능성과 속물적 공공건축의 신념에 머물러
  • 애니쉬 커푸어의 '아르셀로미탈 궤도', 2011년 말 예정
과거 러시아,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소비에트 연방의 구성주의(constructivism) 예술가였던 엘 리시츠키(Lazar El Lissitzky)는 1919년 '두 개의 사각형 이야기'라는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 책을 발표하였다.

이 책의 특이한 점은 이야기가 모두 사각형, 원, 삼각형, 원기둥과 같은 기하학적인 도형으로 전개된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확한 줄거리를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대체적인 내용은 원래의 평범한 사각형이 다른 외부의 도형들과 충돌하면서 그 위에 붉은 색의 도형들이 지어지게 됨으로써 다른 사각형이 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외부환경과의 혁명적 투쟁을 통해서 새로운 환경을 창출한다는 변증법적 혁명의식을 담고 있는 듯하다.

추상적인 기하학적 도형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분명한 내용을 읽어낼 수 없으므로 혁명의식을 고취하기 어렵다는 비난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기하학적 추상이야말로 리시츠키를 확고한 구성주의자로 정의할 수 있는 특징이다.

당시 구성주의자들은 기하학적 추상을 열렬히 옹호하였다. 그 이유는 기하학적 추상이야말로 현실의 구체적인 대상을 연상시키는 구상과 달리 미리 주어진 어떠한 선입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 타틀린의 '제3인터네셔널 기념탑', 1919
가령 꽃이라는 구상 이미지는 아름다움, 허영, 사치 등의 선입견과 맞물려 있다. 이러한 선입견은 관습으로 굳어진 공통적인 생각, 즉 이데올로기이다. 사회주의 혁명가였던 구성주의자들의 급선무는 이러한 기존의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기하학적 추상은 사람들에게 어떤 정서적인 자극을 주지만 전통적인 통념으로부터는 벗어난 것이었다. 그것은 어떠한 관습적인 이데올로기도 유발하지 않으면서도 인민들의 혁명적인 의식을 고취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언어였던 셈이다.

하지만 직사각형, 삼각형, 원뿔 등의 기하학적인 도형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곧 전통적인 가치기준을 벗어나 과학적인 세계관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다른 서유럽의 열강에 비해서 뒤처져있던 러시아의 경우 이것은 곧 진취적인 미래를 표현하는 새로운 가치관의 표현이었던 셈이다.

러시아 10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서 구상한 타틀린(Vladimir Tatlin)의 기념탑은 이 모든 가치관을 담고 있다. 이 기념탑은 원래 에펠탑의 크기를 능가하는 길이 400미터의 금속과 유리 구조물로 계획되었다. 하지만 정작 1920년에 세상에 공개된 것은 길이 6미터 정도의 목조 구조물 모형이었다.

탑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얇은 목재로 된 뼈대의 그물망과 두 개의 나선형 기둥으로 된 원뿔형 틀 안에 네 개의 입체물이 공중에 매달려있다. 네 개의 입체물은 단순한 구성물이 아닌 각각의 독립된 기능적 건물로서 서로 다른 시간적 주기로 회전한다.

  • 엘 리시츠키의 작품, 1919
맨 밑바닥에 있는 원기둥 건물은 1년에 1회전의 속도로 회전하는데 인터내셔널 회의를 위한 건물이며, 그 위에 있는 피라미드형 건물은 1개월에 한 번 회전하는데 인터내셔널 임원진을 위한 것이다. 그 위층에 있는 원기둥은 하루에 한 번 씩 회전하는데 선동부가 쓸 건물이었다. 나중에 첨가된 최상층부의 반구형 건물은 한 시간마다 한 번 씩 회전한다.

아마도 당시의 기술로는 실현가능성이 크지는 않았을 것 같은 이 기념비적인 탑은 새로운 예술적 가치기준뿐만 아니라 기술적 패러다임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 기념탑은 마야코프스키가 '턱수염 없는 최초의 기념탑'이라고 부를 만큼 새로운 것이었다.

과거의 전통적인 기념탑은 수염이 난 장군이나 역사적인 인물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동상이었기 때문이다. 탑은 입방체, 원통형, 구체, 원뿔, 호, 구면 등으로 표현됨으로써 마치 큐비즘이나 미래파의 아방가르드적인 정신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분명한 사실은 이 탑의 형태와 재료 속에는 기계로 대변되는 당대의 기술적 패러다임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과학적 모더니즘의 정신이 인민의 해방이라는 사회주의적 이상으로 표현되고 있는 셈이다.

2012년 런던 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워질 새로운 기념비적 탑은 타틀린의 탑과는 다른 새로운 기술적 패러다임과 이상을 함축한다. 애니쉬 커푸어(Anish Kapoor)가 디자인하고 2011년 말에 완공하게 될 이 새로운 탑은 여러모로 에펠탑과 타틀린의 탑을 연상시키지만 명백하게 이들을 넘어서고 있다.

후원사인 세계 최대의 철강회사 아르셀로미탈(ArcelorMittal)의 이름을 따서 '아르셀로미탈 궤도'(ArcelorMittal Orbit)로 불리게 될 이 탑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기하학적 도형이라기보다는 비정형적인 굴곡의 형태를 띠고 있다.

실제로 1,400톤의 엄청난 강철이 이 탑에 사용될 것이기도 한데, 강철은 당연히 현재의 디지털 기술에 의해서 자유롭게 변형된다. 강철 빔을 자유롭게 변형하여 기념비적인 작품을 보여준 선례로는 이미 헤어조그와 드뮈론(Herzog & DeMuron)이 설계한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인 '새둥지'(Bird's Nest)를 들 수 있다.

이 건축물에서도 경기장의 외부 테두리를 무수히 많은 강철 빔으로 둘러싸고 있는데, 이 강철 빔들은 모두 다른 곡면과 경사를 지니고 있는 것들이어서 표준화와 대량생산에 의해서는 제작될 수 없다. 각각의 빔은 컴퓨터로만 설계가 가능하며, 절삭 또한 컴퓨터로만 가능한 것이다.

커푸어의 기념비적인 탑인 '아르셀로미탈 궤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기념탑은 복잡하고도 다양한 만곡을 이루는 강철 빔에 의해서 제작된다. 당연히 곡면의 변화는 파라미터로서 측정되는 디지털 디자인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커푸어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이 탑은 디지털 기술을 통한 파라미터 디자인의 결과물이다. 궤도는 일차방정식 혹은 이차방정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계적인 측정을 거부하며, 모더니즘의 기계 시대와는 다른 위상수학으로만 해결된다. 따라서 궤도의 흐름은 예측이 불가능할뿐더러 표준화와 기계화를 거부한다.

이러한 점에서 커푸어의 기념탑은 정확하게 디지털 매체의 패러다임을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에펠탑이나 타틀린의 기념탑이 함축하고 있던 기계 매체와는 전혀 다른 매체를 상징하는 것이다. 모더니즘의 기계는 변형과 일탈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동어반복(토톨로지, tautology)과 환원으로 모든 형태를 구성하였던 미니멀리즘 조각이 기계의 메커니즘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커푸어의 기념탑은 이러한 패러다임을 훌쩍 뛰어넘고 있다. 그의 기념탑은 단순한 형태의 동어반복도 아니며, 어떤 특정한 모듈로 환원되지도 않는다. 또한 규칙성을 결여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기하학적 도형으로 간주될 수도 없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이 기념탑은 전통적인 기계 매체와는 전혀 다른 매체의 패러다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커푸어의 기념탑은 자유로운 변형가능성이라는 디지털 매체 자체의 고유한 특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커푸어의 기념탑은 분명 우리 시대의 새로운 매체를 함축할 뿐만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미학적 정서에 부응하고 있다. 그러나 커푸어의 기념탑이 결여하고 있는 것 또한 분명하다. 타틀린의 탑은 전통적인 귀족 또는 부르주아지의 낭비와 타락이라는 관행에서 벗어나 모든 인민을 해방시킬 수 있는 과학적 정신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유감스럽게도 커푸어의 탑에서는 디지털 매체를 활용한 새로운 디자인의 가능성과 런던의 새로운 랜드마크 건설이라는 속물적인 공공건축의 신념 이외에 어떤 진지한 고민도 발견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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