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in the Kitchen] (6) 아이스크림내 안의 애교본능 발견하는 즐거운 한 순간

음식마다 어울리는 이미지가 있다.

바나나는 원숭이와 어울리고, 사과는 미인과 어울리고, 흑맥주는 짐승남과 어울린다.

아이스크림과 어울리는 건 어린이나 '레이디'다. 여름이면 누구나 체면불구 하나씩 손에 들지만 어린이나 숙녀의 손에 있을 때 아이스크림은 제 기능을 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아, 이 달콤하고 부드럽고 시원한 걸 먹으면 행복해져요" 같은 집단적 무의식의 발현 같은 것 말이다. 의약품도 아닌 주제에 투여 후, 사람의 감정을 '행복하게' 끌어올리는 것은 아마도 아이스크림이 유일할 듯한데, 실제로 그렇든 아니든 사람들이 그렇다라고 믿고 싶어 하는 것은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특유의 묘한 표정 때문인 듯하다.

사진을 찍어 보면 안다. 동물원이나 놀이공원에 가면 꼭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들고 사진 한 장씩 찍는 것처럼, 사진 속 아이스크림을 먹는 모습은 대개 주인공들이 여유로운 한 때를 보낼 때 연출된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아이스크림을 먹든, 아이스크림 먹는 표정은 대개 일관돼 있다. 입은 반쯤 벌리고(가끔 혀도 내밀고), 눈은 카메라 렌즈와 아이스크림을 탁구공처럼 왔다 갔다 하고, 미소는 어느 때보다 자연스럽다. 꼭 "나도 이런 구석이 있었답니다"하는 것처럼.

왜 모두들 아이스크림 앞에 서면 귀여운 척하는 걸까?

왜 귀여운 척 하는 거지?

아마 오드리 헵번 때문일 게다.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내 안의 애교본능을 발견하려는 것은. 영화 <로마의 휴일>를 보고 나면 오드리 헵번의 짧은 머리와 스커트, 그리고 아이스크림밖에 기억에 남지 않는다.

이게 필자만은 생각은 아닌 듯한데, 그녀가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트레비 광장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게 쓰레기 처치곤란으로 금지됐다고 하니, 사람들도 참 어지간히 먹어댔나 보다. 영화 속 헵번은 그 특유의 순진한 표정으로 자신 앞에 펼쳐진 모든 사건, 사고에 대해 천진난만하게 대처하는데, 특히 아이스크림 앞에서는 흥분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이 오버가 그레고리 펙에 대한 헵번의 내숭이라고 짐작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 속 헵번은 한 나라의 공주이고, 그 같은 훈남은 그녀의 지천에 널렸을 터, 이 흥분은 오롯이 아이스크림을 향한 것이라 보아야 마땅하다.

각종 옷과 장신구를 비롯해 말과 행동, 취침 전 크래커 세 조각과 우유를 먹는 것까지 공주의 기품을 위해 통제되던 생활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자유를 만날 때, 그녀가 먹은 음식이 아이스크림이었다. 그러니 그런 표정을 지을 수밖에.

헵번에게 아이스크림이 처음 만나는 자유라면, <8월의 크리스마스> 속 심은하에게 아이스크림은 첫 연애의 떨림 같은 것이다.

"아까 저 때문에 화났었죠? 날씨도 덥고 아침부터 너무 힘들어서 그랬어요. 미안해요."

죽을 병에 걸린 사진사 정원(한석규 분)이 병원을 찾던 날, 불법 주차단속 요원인 다림(심은하 분)은 아침부터 다짜고짜로 사진을 인화해 달라고 말하고, 사진관에 늦게 온 정원은 사과할 필요도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말하며 아이스크림을 건넨다. 무릇 모든 연애가 그러하듯이. 이들은 놀이공원에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사먹는 어색한 사이가 되고, 밥숟가락을 나란히 들고 아이스크림 한 통을 나눠먹는 사이가 된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다림 "아저씨 외아들이죠? 그렇게 먹는 거 보면 알아요. 우리 집은 아이스크림 먹을 때 난리를 쳐야 되거든요."
정원 "먼저 먹어. 형제가 많아?"
다림 "우리 엄만 뭐하려구 그렇게 많이 낳는지 몰라, 정말. 아저씨 저기요. (스푼으로 아이스크림 가운데 선을 그으며) 선을 딱 이렇게 긋는 것부터 전쟁의 시작이에요."
정원 (재미있다는 듯 웃는다)
다림 "지겨워."

고된 일상에서 만난 정원은 다림에게 초원 같은 사람이지만 정원이 죽을 때까지, 다림은 이 일상의 소중함을 알지 못한다.

인생은 아이스크림과 같지

이 말을 영화 <블랙>에서는 이렇게 콕 짚어 말한다.
"인생은 아이스크림일 뿐이야. 녹기 전에 달고 차갑고 맛있게 먹어야지."

소리는 침묵이 되고, 빛은 어둠이 되었던 8살 미셸에게 사하이 선생은 말한다. 자신의 어둠 속에 질식하지 않는 시간을 보내라고.

영화 '로마의 휴일'
무릇, 모든 이에게 아이스크림은 이런 의미일 게다. 인생의 가장 행복한, 혹은 그랬을 것이라 여기는 한 때. 하지만 그것이 행복임을 알게 됐을 때 이미 주워 돌이킬 수 없는 시절 같은 것 말이다. 마치 지금 당장 먹지 않으면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처럼.

우리에게 행복은 언제나 기억나지 않는 과거 어느 한 자락에 있다. 때문에 아이스크림은 아득할수록 더 맛있게 느껴지는 법이고, '옛날 맛'일 때 최고의 맛이 된다. 그러니 제 아무리 빙과 기술이 발전해도 아이스크림은 꼭 아련한 어린 시절의 아이스크림이 제일 맛있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몇 해 전 국내 빙과류 판매 순위를 발표한 적이 있다. 1위가 설레임, 2위가 월드콘, 3위가 브라보콘이었고, 비비빅, 돼지바, 스크류바, 더위사냥, 빠삐코, 투게더, 메로나가 그 뒤를 이었다. 1위 설레임을 제외하면 가장 젊은 아이스크림은 메로나로 1992년 출시된 제품이고, 나머지 제품은 거의 모두 70~80년대 생 아이스크림이다.

제아무리 무한경쟁과 글로벌 스탠더드를 외치는 세상이지만, 아이스크림 입맛에 있어서는 70~80년도 '한국의 맛'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 아이러니는 사람들은 어린 시절(혹은 젊은 시절), 아련한 맛을 아이스크림의 정석으로 여긴다는 가정을 빼면 이해하기 힘들다.

'아, 이 달콤하고 부드럽고 시원한 걸 먹으면 행복해져요'
행복하다고 믿게 만드는 마력. 아이스크림의 매력은 이것이다.

그러니 아이스크림 먹을 때는 잠깐 귀여운 척해도 된다. '내 인생의 행복한 순간'이라는데 누가 돌을 던지겠는가. 이 순간이 지나면 녹아 흐를 텐데.

'왜 붉은 모래가 쏟아지지/ ......아, 햇빛이군/ 행복한 하루의 시작....../ 행복이란 말은 빼주게/ 너무나 먹고 싶은 구름 같은 말/ 있어도 금세 없어질까 두렵네' (신현림 '아이스크림 언덕' 중에서)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