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ic in Cinema](24) 영화 <칼라스 포에버> 속 오페라 <토스카>의 아리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자신의 일생 같은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부르며 오열

오페라 가수 중에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만큼 오페라의 부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흔히 기원전을 '예수 탄생 이전(Before Christ)'이라는 의미의 B.C.로 표시하는데, 오페라의 역사에도 B.C.가 있다. '칼라스 이전(Before Callas)'과 이후이다.

칼라스 이전에 오페라 가수들은 오페라의 극적인 측면이나 연기에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저 노래만 잘 부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밋밋한 오페라에 극적인 요소를 불어넣은 사람이 바로 마리아 칼라스이다.

마리아 칼라스는 완벽한 연기와 드라마틱한 목소리, 무대를 장악하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수많은 사람들을 오페라 극장으로 끌어들였다. 지금 녹음으로 남아 있는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당시 사람들이 왜 그토록 그녀에게 열광했는지 알 수 있다.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녀를 필적할만한 소프라노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어쩌면 몇 세기를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오페라의 역사를 바꾸어놓은 위대한 인물이지만 정작 마리아 칼라스 하면 선박왕 오나시스와의 염문설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오나시스와 재클린의 결혼으로 졸지에 비련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마리아 칼라스는 한동안 음악잡지보다 주간지 가십난에 더 자주 등장하는 처지가 되기도 했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그녀의 '예술'보다 그녀의 '비극적인 사랑'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생전에 마리아 칼라스와 친하게 지냈던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은 이 점을 염려스러워했다. 칼라스가 출연하는 오페라의 연출을 맡으며 그녀와 가까이 지냈던 제피렐리는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녀의 일대기를 영화로 만들라는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거절했다. 사람들이 그녀의 사생활에만 관심을 가질 뿐, 진정한 예술가로서 그녀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런 프랑코 제피렐리가 칼라스 사망 30주기가 되는 지난 2007년 드디어 영화 한 편을 세상에 내놓았다. 바로 <칼라스 포에버>이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물론 픽션이다. 오페라 가수로서 화려했던 삶을 뒤로 한 채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외롭게 살고 있는 칼라스에게 어느 날 친구이자 공연기획자인 래리가 찾아온다. 그는 칼라스에게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일을 벌이자고 한다.

오페라 <카르멘>을 영화로 만들자는 제안이다. 카르멘 역은 칼라스가 맡고, 음악은 그녀가 전성기 때 녹음한 것을 쓰는, 말하자면 그녀의 현재와 과거를 합쳐 한 편의 영화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물론 칼라스는 처음에 이것은 사기라며 단호히 거절한다. 하지만 래리의 계속된 설득으로 결국 마음을 열고,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드디어 촬영이 시작되고, 칼라스는 전성기 때 불렀던 자기 목소리를 립싱크하며 영화를 찍는다.

영화 <칼라스 포에버>의 매력은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를 마음껏 들을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카르멘>에 나오는 <하바네라>, <집시의 노래>와 같은 아리아는 물론이고, 칼라스의 특기인 <정결한 여신>을 비롯해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어떤 갠 날> 등 주옥같은 아리아들이 영화 전 편에 흐른다.

이 중에서 특히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를 들을 때 가슴이 미어진다. 이 노래는 칼라스 자신의 노래라고도 할 수 있다. 제목 그대로 칼라스는 일생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았다. 하지만 그 대가가 너무도 참혹했다. 오페라 <토스카>에서 토스카는 신에게 이렇게 항의한다. "나는 그동안 착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신에게 열심히 기도를 드리며 살았는데, 그 대가가 고작 이것입니까? 왜? 왜? 나에게 이런 식으로 갚으십니까?"

영화에서 칼라스는 이 노래를 부르며 오열한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나 세상에서 단 한 사람의 사랑을 얻는 데에는 실패한 오페라의 디바. 칼라스의 사생활을 될 수 있는 대로 피해가려고 했던 제피렐리도 오나시스에 대한 얘기를 빼고서는 그녀의 삶을 제대로 그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는 그가 찾아낸 일종의 절충인지도 모른다. '노래'와 '사랑' 두 가지를 모두 아우르는.



글 진회숙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