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영화뿐 아니라 책·공연 통해 확산… 획일화 된 연애론 비판 필요

연극 '훈남들의 수다'
멋진 외모의 남자가 등장하면, 기다리고 있던 서른 명의 여자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하지만 잠시 후 남자의 상세 정보가 추가로 공개되며 단점들이 발견되자 남자의 인기는 금세 식어버린다. 결국 여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 남자는 쓸쓸히 무대 뒤로 퇴장한다.

1990년대 <사랑의 스튜디오>의 '사랑'이 결혼을 의미했다면, 2010년 <러브 스위치>의 '러브'는 연애를 가리킨다. 10여 년 전의 남녀 출연자들은 어떻게든 상대방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를 썼지만, 지금의 남녀 출연자들은 거침없이 호감을 표현하다가도 쿨하게 돌아선다. '다음 버스'는 또 온다는 생각에서다.

프랑스의 인기 프로그램 포맷을 차용한 <러브 스위치>의 높은 시청율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합리적 연애'에 있다. 자신과 맞는 짝을 고르고, 짝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일찌감치 연애전선에서 손을 뗀다. 무조건적인 커플 탄생은 여기서는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물론 커플의 환상을 심어주는 목소리도 여전하다. '솔로천국, 커플지옥'의 구호는 개그콘서트에만 있지 않다. 최근엔 드라마나 영화뿐만 아니라 도서와 공연에서도 사람들에게 연애를 권유하고 있다.

연극 '연애희곡'
연애를 하고 있지 않은 솔로들은 이런 메시지에 따라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목소리들은 솔로들에게 종종 솔로의 원인을 무능함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이런 사회에서 솔로는 자기 의지와 관계 없이 '불쌍한' 존재가 된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이런 매체들이 갖는 연애의 획일화된 형식들이다. 발렌타인 데이나 화이트 데이, 크리스마스와 생일 등 각종 기념일에 따라 묘사되는 데이트 기법은 연애의 방식마저 정형화시킨다.

자기계발서가 주요 순위에서 빠지지 않는 출판계에서도 '연애는 이렇게 하라'라는 연애 비법서가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 '외로움에 몸서리치는' 싱글을 위한 현실적인 지침서를 표방하는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는 전략이었다>는 한 연애칼럼니스트가 7년에 걸쳐 취재한 결과를 망라했다.

일본의 고급 클럽 호스티스가 썼다는 <악마의 연애술>은 남자를 단번에 유혹하는 실전 노하우가 그대로 담겼다. 최근 나온 <닥터엘 연애상담소>는 저자가 2년에 걸쳐 상담한 6백여 건의 연애사 중 꼭 알아야 할 75개의 에피소드를 간추렸다.

책들이 보여주고 있는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 등 다양한 접근 방법은 연애도 공부해야 하는 시대임을 보여주고 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이들 연애비법서들이 대부분 여성 독자를 대상으로 쓰여졌다는 것이다. 이는 슈퍼걸, 골드 미스 등 사회적 위치가 높아졌지만, 이제 연애마저 잘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여성들의 상황을 보여준다.

페미니스트이자 30대 후반의 비혼인 <남자는 초콜릿이다>의 저자 정박미경은 "여자에게 연애란 남성 중심 사회의 연애 각본과 싸우는 고군분투 생존기"라고 정의하며 "죄의식을 버리고 자기 욕망에 솔직히 답한다면 누구나 강하고 아름다운 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올해 출판된 책들은 이처럼 '연애도 잘해야 하는' 여성들을 위해 보다 구체적인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 SBS <골드미스가 간다> 제작진이 기획하고 <코스모폴리탄> 인 저자가 풀어놓은 연애비법 <연애하려면 낭만을 버려라>는 '소개팅 백전백승 방법', '주변의 훈남 공략하는 법', '지금보다 더 즐거운 섹스하기' 등 말 그대로 '낭만을 버린' 연애 테크닉을 다뤘다. 연애 못하는 30대 여자들을 위한 맞춤 카운슬링 <서른 살 연애법>도 '똑똑하게 들이대야' 내 남자로 만들 수 있다고 노골적으로 조언한다.

하지만 만연한 연애 테크닉 속에서 구속과 집착 같은 감정노동에 지친 여성들을 위해 더 진화된 연애법도 등장했다. 7월말 출판된 <분산연애>는 여러 사람에게 사랑을 나누어주고 여러 사람에게 사랑을 받자는 신개념 연애전략을 주장한다. 일대일 연애라는 형식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여러 명에게 분산시킴으로써 괴롭지 않은 연애를 하는 여성이 되라는 것이다. 이 같은 '일대다', '다대일'의 연애 제안은 현대인의 연애에 대한 스트레스를 말해준다.

한편 공연계에서는 남자들의 연애담이 화제다. 지난달부터 대학로 나온씨어터에서 올려지고 있는 연극 <훈남들의 수다>는 30대 초중반 남자들의 속을 보여준다.

이제까지 무대 위 연애담, 특히 성 담론은 여자들의 심리를 다룬 작품이 지배적이었다. <버자이너 모놀로그>나 <싱글즈>, <달콤한 나의 도시> 같은 작품들이 여성 관객의 공감대를 형성시켰다. 반면 남자들의 연애 심리는 일부 '야한 연극' 안에서 일그러진 욕망으로만 다뤄지기 일쑤였다.

<훈남들의 수다>는 여성들의 위상이 나날이 달라지고 있는 이 시대, 남자로 살아가는 네 주인공들의 질펀한 수다를 통해 그들만의 연애 심리를 파헤친다. 작가 역시 "이 작품을 통해 남자들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시키고 여성 관객이 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싶었다"고 밝히고 있다.

오는 9월 개막을 앞둔 스크루볼 코미디 <연애희곡>은 제목에서부터 본격적인 연애담론을 시사한다. 작가는 현실과 비현실의 인물들의 입을 빌어 "마음 없이 사랑할 수 없다, 사랑 없이 섹스할 수 없다, 몸을 섞어보면 사랑이 보인다' 등의 노골적이고 거침없는 담화를 펼쳐놓는다. 하지만 작가는 이야기를 진행시키며 '연애에서는 두 사람만 있으면 된다'라는 평범하면서도 감동적인 사랑의 속성을 발견하게 한다.

연애는 이제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화 현상 가운데 하나가 됐다. 그리고 각종 문화 매체가 전달하는 연애의 메시지는 그대로 솔로나 커플들에게 하나의 전형이 된다. 이런 매체들이 전달하고 있는 '연애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필요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