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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대표음식, 역사를 맛 보다

[Story in the Kitchen] (7) 냉면
겨울 절식서 양반·지식인 별미, 분단의 상징으로 시대를 반영
  • 평양냉면 을밀대 물냉면 모습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루굴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백석의 시 '국수'에 나오는 '이것'이 오늘날 냉면을 뜻한다는 걸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터다.

차가운 동치미국에 꿩고기를 얹고 댕추가루(고추가루)와 탄수(식초)를 뿌려 한겨울 뜨거운 아루굴(아랫목)에서 먹던 이것. 냉면은 본래 겨울 음식이지만 기술이 발전하고 시대가 변하며 이제 여름 음식의 대표가 됐다.

새우깡과 초코파이가 40년 전 '그 맛'이 아니듯, 모든 음식은 각 시대와 세대에 맞게 바뀐다. 그러나 냉면만큼 음식이 가진 상징성까지 버라이어티하게 변한 음식은 드물다. 겨울철 절식이었던 이 음식은 양반과 지식인들의 세련된 별미가 됐다가, 이제 분단현실과 북한의 상징처럼 등장한다.

모던 걸, 모던 뽀이의 음식

  • 함흥냉면
'냉면이란 쇠고기국물이나 동치미국물 등에 메밀 면을 말아먹는 음식이다. 평양식이 크게 번져 흔히 평양냉면이라 한다.'

황교익의 <미각의 제국>에 나온 냉면의 정의다. 냉면을 문자 그대로 '차가운 면'으로 본다면 그 대상은 메밀국수, 막국수, 냉라면과 출처를 알 수 없는 중국식 냉면까지 한정 없이 넓어지겠지만, 우리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냉면은 황교익의 정의와 비슷하다.

면의 역사가 수천 년을 이어오듯, 면의 '파생 상품'인 냉면 역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구체적으로 냉면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메밀국수에 대한 언급은 17세기 조선의 대문장가였던 장유(1587~1638)의 문집 <계곡집>에 실린 시에 나온다. '자줏빛 육수에 냉면을 말아 먹고'란 제목의 시다.

'노을빛 영롱한 자줏빛 육수(紫漿霞色映)/ 옥 가루 눈꽃이 골고루 내려 배었어라(玉紛雪花勻)/ 입 속에서 우러나는 향긋한 미각(入箸香生齒)/ 몸이 갑자기 서늘해져 옷을 끼어 입었도다(添衣冷徹身)'

장유의 시는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냉면의 맛과 거의 비슷한 듯하다.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도 그의 시문집에서 벗과 더불어 냉면·온면을 먹는 즐거움을 노래했다. 동치미국물과 육수로 맛을 낸, 게다가 꿩고기를 고명에 얹은 이 냉면을 아무나 맛 볼 수 있었던 건 아닐 게다. 당시 냉면은 양반가의 음식이었다.

  • 금강산 '옥류관 냉면'
근대를 맞으며 평양냉면은 서울까지 진출한다. 냉장고의 도입으로 겨울철 절식은 여름철 별미로 효용가치가 급상승했다. 1920년대에는 서울에도 낙원동 평양냉면, 광교 백양루, 돈의동 동양루 등 평양냉면 가게가 생겼고 곧 서울의 모던보이, 모던걸, 유한층들이 즐겨 먹는 별식으로 자리잡는다.

작가 김량운이 1926년 <동광> 8호에 발표한 소설 '냉면'에는 주인공인 신문가 전차를 타고 종로를 지나다 갑자기 냉면이 먹고 싶어 급한 마음에 차장에게 '정차'란 말 대신에 '냉면'이라고 외쳤다는 일화가 나온다.

냉면을 소재로 한 글은 이 시대 지식인들의 수필에서 자주 등장한다. 평안도 태생 작가 김남천은 주식처럼 냉면을 먹었는데, 거리에서 친구를 만나면 차대신 냉면을 먹으로 갔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그는 1938년 <조선일보>에 발표한 수필 '냉면'에서 이렇게 밝힌다.

'쌀로 만든 음식물보다도 이르게 나는 이 국수 맛을 알았을는지도 모른다. (…) 누가 마을을 오든가 한 때에 점심이나 밤참에 반드시 이 국수를 먹던 것을 나는 겨우 기억할 따름이다.' 이 수필에서 그는 화풀이로 담배 피우고 술 마시듯 냉면을 먹는 평안도 사람들의 심리를 소개하고 있다.

박목월의 수필 '냉면 맛, 숭늉 맛'에서도 냉면에 대한 상찬은 이어진다. 그는 청록파 시인답게 냉면 맛을 '공감각'으로 표현한다.

'원래 기본적인 미각은 짜고 달고 쓰고 신 것이다. 이 네가지 기본 미각을 정점으로 이룩된 사면체(四面體)가 바로 미각의 사면체다. 이 기본 미각 이외에도 맵고 떫은 것들이 있으나, 그것은 순수한 미각이라기 보다는 피부 감각이나 후각 등과 혼합된 것이라고 한다. 미각을 색감으로 표현할 경우 단맛은 황색, 신맛은 청색에 틀림없을 것이다. 단 맛의 용해적 황홀감은 노란빛과 통할 것 같고, 신맛의 서늘한 신선미는 청색과 통할 것 같다.'

분단의 상징, 평양냉면

유한계급의 별식이었던 냉면은 분단 이후, 북한 문화를 드러내는 기제처럼 쓰인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배경이 있을 터다. 우선 분단 후 남한에 정착한 실향민 혹은 탈북자들이 북한전문 음식점을 하며 냉면을 선보인 까닭이다. 요즘도 서울에서도 내로라하는 평양냉면 집의 손맛은 모두 이북출신들이 내고 있다.

김원일의 <가족>은 냉면 요식업으로 성공한 실향민 가족을 배경으로 쓴 장편소설이다. 냉면으로 성공한 1세대에 이어 IMF로 가게가 몰락하며 사회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2~3세대를 통해 실향의 아픔, 대중문화의 물신화 현상 등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1세대 김석현이 월남 후 냉면으로 상징되는 '가계 세우기'에 치중했다면 2세대 김치효는 가계 잇기에 전념한다. 그러나 3대 김용규, 김시규, 김선결, 김준에 이르면 삶의 방식은 다양하게 변주된다.

한편 북한 관광이 시작된 이후, 평양의 냉면집 옥류관은 여행 단골 코스가 됐고, 이곳은 평양의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 공간이자 남과 북이 교류하는 '평화 지대'로 비춰진다.

영화 <국경의 남쪽>에서 냉면은 영화 초반부 선호(차승원 분)와 연화(조이진 분)의 데이트신에서 등장한다. 눈에 콩깍지가 씐 선호는 연화와 평양 옥류관에서 시원한 물냉면을 함께 먹으면서 결혼 의사를 슬쩍 내비친다. 부끄러워하면서 공손히 냉면을 먹는 선호와 연화의 모습은 이태리 파스타집에서 데이트 하는 남한의 커플과 대조를 이룬다.

무라카미 류의 장편 <반도에서 나가라>는 북한군 특수부대원들의 공격으로 일본 열도가 전란에 휩싸인다는 줄거리의 소설이다. 작가는 2003년 십수 명의 탈북자들을 인터뷰해 북한의 현실을 소설에 재현시키고 있는데, 특히 옥류관 정경 묘사를 통해 북한 정권의 부패한 실상을 드러낸다.

'당이나 군 간부 이외의 사람이 옥류관에서 냉면을 먹으려면 직장에서 식권을 배급받아야만 한다. 평양 각 사무소나 공장에 나눠주는 식권은 1000명 당 1명의 비율로, 하루에 배급되는 식권은 전부 200장이라고 한다. 그 이외의 사람들은 식당 입구 앞에 늘어서서 그날 파는 식권을 사야 한다. 식권을 사려는 사람들의 행렬로 암표상 몇이 다가서는 게 보였다.'

전성태의 <목란식당>은 울란바토르에 있는 북한식당을 배경으로 쓴 단편이다. 극우 기독교 단체, 교민사회 구성원, 타락한 386세대 등 목란식당을 오가는 남한 손님과 북한 접대원의 미묘한 관계는 오늘의 남북 현실을 투영하고 있다.

'평양 옥류관에서 공훈 냉면요리사가 직접 나왔다지 뭐냐. (…) 남쪽 사람들에게 목란이 단지 식당일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나도 잘 알았다. 이것도 일종의 분단 장사인 셈이다. 미국의 맥도널드처럼 목란은 북을 대표하는 식당이었다.'

여름 뜨거운 햇살 아래 차가운 냉면은 입맛을 돌게 한다. 수수하고 슴슴한 국물에서 화학감미료가 포함된 새콤달콤한 국물로, 출처 없는 퓨전식으로 날로 발전하는 냉면. 이 여름별미는 우리의 역사를 담고 있다. 냉면의 계절이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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