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보드 굽타 개인전식기 테마 작업 서울서 신작, 천안선 과거 대표작 선보여

The Way Home 2, 2001
"잠깐만요."

전시장 바깥으로 나가려던 일행이 일제히 멈췄다. 돌아 봤더니 작가가 한 작품 앞에 서 있었다. 널찍한 인도 쟁반 위에 호쿠사이의 우키요에(일본 에도시대 목판화 양식)에 나올 법한 파도가 넘실대는 대리석 작품. 희고 매끄럽고 얌전하다. 파도조차 쟁반 가운데로 가지런히 모여드는 모양이다.

그런데 무엇이 불만이었을까. 작가는 결심한 듯 손에 들고 있던 병의 마개를 열었다. 내용물을 천천히 부었다. 앗. 순간 지켜보던 이들의 얼굴이 굳었다. 찐득찐득한 폐유가 파도를 덮었다. "드디어 완성되었네요." 작가는 혼자 홀가분한 표정이다.

"아름답긴 했지만 너무 꿈같은 이미지였잖아요. 설치해 놓고도 어떻게 비틀까 고민하고 있었어요. 기름 유출 사고는 세계적 이슈죠. 이제야 작품이 현실이 되었네요."

그 사이 검은 얼룩은 제법 그럴 듯하게 자리 잡았다. 지난 8월31일 간담회 때 벌인 '퍼포먼스'는 이 작가가 세계 미술계의 이목을 끄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이질적인 상징들을 진지하고도 재치 있게 버무린 작업으로 알려진 인도 작가 가 한국에 왔다.

지난 1일부터 아라리오갤러리 서울과 천안에서 그의 첫 국내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서울에는 신작이, 천안에는 <집으로 가는 길Ⅱ(The Way Home Ⅱ)>(2001), <모든 것은 내면에 있다(Everything is Inside)>(2004), <믿음의 도약(Leap of Faith)>(2005) 등 과거 대표작이 전시됐다.

는 지역적인 모티프에서 보편적인 이슈를 풀어내는 작업으로 유명하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스테인리스 스틸 식기를 소재로 한 작품을 예로 들 수 있다. 스테인리스 스틸 식기는 인도의 가정에서 흔하게 쓰이는 물건이다. 부자도, 가난한 이도, 신분이 높은 이도, 구걸하는 이도 식사 때마다 스테인리스 스틸 그릇에 일용할 양식을 담는다.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어쩔 수 없이 먹고 사는 일 앞에 평등해진다. 작가는 이 점에 착안해 스테인리스 스틸 식기를 여러 형태로 쌓거나 모아 붙인 작품들을 선보여 왔다. 이 작품들은 때론 엄청난 규모로 카스트 제도를 꼬집고, 때론 핵폭발과 해골 모양으로 인간의 탐욕과 근시안을 허망하게 만들었다.

그의 작품에서는 식민지 역사에서 비롯한 서구 문화와의 착종된 상태, 급격한 경제 성장이 낳은 혼란 등 인도를 둘러싼 정치·사회적 이슈들도 자연스럽게 배어난다. 영적인 사회라는 오리엔탈리즘적 시선과 GDP 증가율 이면의, 진짜 인도의 생활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내면에 있다>는 택시의 윗부분을 잘라 청동으로 만든 짐을 얹어놓은 설치 작품이다. 다국적 자본이 인도를 '개발'하면서 보편화된 이주의 삶을 상징한다.

Everything Is Inside, 2004
"가난한 이들이 일자리를 얻기 위해 떠돌아다니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그들은 자동차 지붕에 자신의 짐을 싣고 다닙니다. 여행 가방도 아닌 천 조각에 싸서 동여매지요. 그 안에 그들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있을 겁니다."

이런 풍경이 비단 인도만의 것이 아니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시대를 사는 모든 사회의 내면 풍경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성찰은 더욱 중요해진다.

신작은 대리석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우유통과 도시락통 등 인도 가정에서 쓰이는 일상적 식기를 사람 크기로 재현했다. 대리석이라는 재료의 특성상 경건한 인상이다.

"조각가로서 한번쯤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그리스, 로마 신전의 소재잖아요.(웃음) 하지만 인도에서는 매우 일상적인 소재이기도 합니다. 대리석이 많이 나거든요. 중산층 가정도 쉽게 대리석 욕조를 가질 수 있어요."

귀한 것과 평범한 것, 혹은 귀한 것과 평범한 것에 대한 통념이 위치를 뒤섞으며 공존하는 셈이다.

Untitled, 2010
"왜 식기를 테마로 작업하냐고요? 제가 먹고 요리하는 것을 워낙 좋아해서이기도 하고(웃음) 식문화의 신성함 때문이기도 하죠. 인도에서 부엌은 성소거든요."

이번 전시에서는 심지어 식사가 끝난 후 식탁의 모습을 포착한 신작 회화들도 선보인다. 전시는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는 10월10일까지, 천안에서는 11월7일까지 진행된다.

지역적 모티프서 세계적 현상 짚어내는 '글로컬'한 작가

는 동시대의 가장 '글로컬(Glocal)'한 작가 중 한 명으로 불린다. 지역적 모티프에서 세계적 현상을 짚어내고, 그 접합 지점을 적절히 풀어내기 때문이다. 지난 8월31일 만난 작가는 "내 작업에서 인도가 드러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인도 미술'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인도 작가라는 정체성이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

-내 작업이 직접적으로 인도 전통 미술과 연관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도에 뿌리 내리고 있는 것은 맞다. 어떤 현대 미술도 사회·문화와 동떨어져 있을 수 없다. 작가의 삶 자체가 주변에 반응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수보드 굽타
세계 미술계에서 인정 받고 돈도 많이 벌었다. 그만큼 인도 대중의 삶에서 멀어진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내 삶의 터전은 인도다. 아내가 영국인이고 아이들도 영국에 있는데 나만 뉴델리에 남았다. 지역민들과 여전히 가깝게 지낸다. 나 자신이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하다. 번 돈의 일부를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부하고 있기도 하다.

작품에 등장하는 해골 모티프는 서구의 '바니타스'(삶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정물화 양식)를 떠올리게 한다.

-인도에서 미술을 배우면 자연스럽게 서구 전통을 익히게 된다. 정물화도 서구식으로 배운다. 그런 경험이 배어난 탓도 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이해는 여러 사회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화이기도 하다.

세계가 주목하는 작가라는 점에 대한 중압감은 없나.

-전혀 없다. 이렇게 돌아다니며 새로운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언제든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