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프리즘] 제너러티브 예술(Generative Art)컴퓨터 등장 후 구체화… 과학적 마인드와 예술적 감성 결합 변화무쌍

Ken Rinaldo, Autopoesis, 2000
바넷 뉴먼(Barnett Newman)의 그림에 나타나는 특징 중의 하나는 거대한 캔버스를 채우는 단일한 색면을 가로지르는 수직선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수직선이 아니다. 화면을 가르는 이 선은 수직선이 아닌 '지퍼'이다.

그가 수직선을 거부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만약 그것이 수직선이라면, 이는 모든 형상의 기초라는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수직선은 틀림없이 직립한 인간의 기준에서 본 인위적인 기준이다. 따라서 그러한 수직선을 기준으로 본 형상은 인간의 '자의적인' 기준에서 비롯된 표상일 뿐이다. 그것은 결코 세계 자체의 순수한 모습이 아닌 셈이다.

여기서 그가 이 수직선을 수직선이 아닌 지퍼로 부른 것은 지퍼가 수직선이 아닌 열어서 펼친다는 행위적인 상황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직선은 세계의 모든 형상에 기초하는 상위의 위계질서를 담고 있다면, 지퍼는 애초에 아무런 위계질서도 없는 '하나임'(onement)에서 비롯된 역동적인 행위를 뜻할 따름이다. 말하자면 뉴먼의 그림은 인간이 임의적으로 창조한 형상의 세계로서의 결과물이 아닌, 어떠한 인위성도 배제한 자율적인 세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추상표현주의자인 뉴먼과 대립되는 화가로 알려진 저드(Donald Judd)나 앙드레(Karl Andre)와 같은 미니멀리스트들의 작업도 사실은 큰 맥락으로 보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몇 개의 반듯한 정방형 나무판을 규칙적으로 배열한 저드의 조각은 말 그대로 단순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똑같은 정방형 나무판으로 이루어진 조각이 나타내는 구조적 특징은 잘 알려진 대로 '토톨로지'(동어반복, tautology)이다. 따라서 동일한 몇 개의 나무판이 동일한 간격을 이루며 동일한 각도로 설치된 이 조각물은 가장 기본적인 단위로 환원가능하다. 이러한 환원가능성의 구조 탓에 미니멀리즘 조각은 말 그대로 미니멀리즘 조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Barnett Newman, Onement, 1948
이러한 환원적 구조는 매우 인위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인위성은 단순한 구조를 형성하는 과정에만 국한된다. 그 뜻인 즉 이러하다. 이 단순한 환원구조는 수학의 간단한 방정식처럼 인위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간단한 수식이 엄청나게 복잡한 방정식으로 확장될 수 있는 것처럼, 이 단순한 조각물은 그 자체가 단순한 완결성만 지니므로 현실적으로는 거의 무한한 상황을 연출할 수 있다. 단지 자기완결적인 단순한 환원구조를 지닌 조각 작품은 그 자체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으며, 상황이나 관객의 반응에 따라서 무한한 의미로 확산되는 것이다.

프리드(Mike Fried)가 이를 두고 미니멀리스트의 작업은 회화답지 못한 문학적 요소인 '연극성'에 의존하고 있다고 비난한 것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 세상의 일을 극본 없는 연극으로 본다면 미니멀리스트의 작업은 환원구조를 지닌 간단한 수식만으로 변화무쌍한 세계의 양상을 펼쳐보이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미니멀리스트의 작업은 본격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제너러티브 아트'(발생예술, Generative Art)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작업은 매우 단순한 환원구조, 즉 알고리즘(algorithm)을 토대로 예상치 못한 복합적인 현상들을 창출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니멀리스트의 작업이 본격적인 알고리즘 예술로 구체화될 수 없었던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그들이 사용하는 매체의 제약 때문이다. 나무나 쇠를 이용한 조각은 그 자체로는 어떠한 변화도 발생하지 않는다. 단지 그 의미와 내용을 상황에 따라서 관객이 연출할 수 있을 따름이다. 말하자면 그들이 만든 단순한 알고리즘을 통하여 각본 없는 변화무쌍한 연극이 만들어질 수는 있으나 그 연극은 오로지 관객과 상황에만 의존할 따름이다. 알고리즘 자체가 외부환경과의 변화를 통하여 변형된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격적인 의미에서 '생성예술'은 컴퓨터에 의한 알고리즘의 활용이 가능한 시기로 미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생성예술의 연원은 이미 미니멀리즘 예술에서 찾을 수 있지만, 그것이 본격적으로 구체화될 수 있었던 것은 컴퓨터의 등장 이후인 셈이다. 컴퓨터와 생성예술, 혹은 알고리즘 예술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Donald Judd, untitled, 1969
얼핏 생각하면 단순한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현상들을 만드는 컴퓨터 예술은 매우 공학적인 의미만을 지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알고리즘 예술이라고도 부르는 이 생성예술은 분명 20세기 미술의 담론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뉴먼이 화면에서 어떠한 인위성도 제거하려는 노력이나 저드나 앙드레가 단순한 환원구조를 바탕으로 복잡하고도 변화무쌍한 세계를 창조하려는 것은 모두 회화의 존재의미 자체에 대한 물음과 관계있는 것이다.

알고리즘 예술이 단순히 과학과 예술의 만남이라는 통속적인 '통섭'의 개념에 갇혀버려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마치 당위적인 명제가 되어버린 듯한 '통섭'이라는 이 진부한 이데올로기는 매우 예민하고도 복잡한 미술의 담론들을 커다란 거대이론에 흡수해버린다. 통섭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그것은 예술 혹은 과학의 과정에 자연스럽게 전제된 것이 아닌 부담스러운 과제나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렸다. 미디어 아트의 과정에는 자연스럽게 과학적인 마인드와 예술적인 감성이 결합되는 것이지, 통섭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실현하는 예술이 결코 아니다.

켄 히나우도(Ken Rinaldo)의 작업은 얼핏 이러한 통섭의 이데올로기를 잘 구현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가령 그가 컴퓨터 알고리즘을 활용해서 만든 '오토포에시스'(Autopoesis, 2000)는 각기 환경에 따라 반응하는 15개의 로봇팔로 이루어져 있다. 천장에 매달린 로봇팔은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달리 반응하며 각기 다른 사운드를 발산한다.

이 작품은 단순히 인간의 팔을 과학적으로 모방한 것이 아니다. 주어진 알고리즘이 복잡한 상황과 얽혀서 예측할 수 없었던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내는 발생적 과정, 혹은 자기 완결적인 대상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는 작가 자신이 20세기 미술의 흐름을 의식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이미 20세기 이후 미술의 흐름 속에 놓여있는 것이다.



박영욱 숙명여대 교양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