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인권영화제13개국 35편 영화 '여성 폭력' 한국에서만 국한되지 않음 보여줘

개막작 <침묵을 말하다>
# 2008년 12월, 조두순(당시 56세)은 등교 중이던 김나영(가명, 당시 8세)양을 유인해 교회 안 화장실에서 강간 상해를 입혔다. 이 때문에 나영 양은 심각한 신체 손상과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범인의 나이와 당시 만취한 상태가 참작돼 형기는 12년형에 그쳤다.

# 남편 X이나 빨다가 그저 시의원이 돼 가지고 – 경남 진해시의 한 의원이 여성 시의원에게 한 발언

# 지난 9월, 모 TV 프로그램에서 걸그룹 f(x)의 중국 출신 멤버 빅토리아가 연애 경험을 말하자 네티즌들이 술렁였다. 마지막 연애가 언제냐는 질문에 빅토리아는 "대학교 때 2년 사귀었다"고 대답했다. 이에 대해 일부 네티즌은 전 남자친구와의 신체적 관계를 들먹이며 2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냐며 그녀를 비난하는 악플을 달았다.

여성을 향해 가혹한 언어적, 신체적 폭력을 가해한 이 일련의 사건은 불과 2년 안에 일어난 일들이다. 한국의 양성평등지수는 115위. 이들 사건 외에도 평등의 수준을 보여주는 근거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아나운서 지망생들에 대한 술자리 면접, 연예인 지망생에의 성 접대 강요, 국회의원의 성차별적 발언 등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진다. 여성의 사회적 위상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나이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한국사회에 여성을 바라보는 가학적인 시선은 만연해있다. 이국 땅에서 시집온 여성이 남편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가 하면 딸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범죄의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공모 당선작 <파마>
한국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공론화된 것은 20여 년에 불과하다. 그러나 1983년에 열린 한국여성의 전화로 걸려오는 전화의 내용은 그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2007년 여성가족부 통계에 의하면 정신적, 신체적 학대를 당하는 여성의 비율은 50.4%에 달한다. 이중 신체적 폭력은 6가구 중 1가구에서 발생한다. 대체 무엇이, 얼마나 나아진 것일까.

한국여성의전화가 2006년에 시작한 <여성인권영화제>를 놓을 수 없는 이유다. 지난해 숨을 고르던 <여성인권영화제>는 '시작했으니 두려움 없이'라는 슬로건으로 지난 10월 6일부터 9일까지 씨네코드 선재에서 네 번째 막을 올렸다

올해 영화제의 키워드는 '여성의 몸', '관계', '연애', '폭력'으로 압축됐다. 13개 국에서 온 35편의 영화는 여성폭력 문제가 비단 한국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그 해의 중요한 이슈를 심층적으로 다루는 '피움 줌 인'과 '피움 줌 아웃'에는 '낙태'와 '연애'가 조명됐다. 최근 울산지방법원이 10대 여성의 요청으로 낙태 시술을 한 의사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하면서 다시 도마 위에 놓인 낙태 문제, 여성의 의사와 무관하게 데이트 중에 성관계를 강요하는 데이트 폭력 등에 관한 영화다.

'9초마다 여성이 폭행당한다.' 이같이 충격적인 보고로 시작되는 개막작 <침묵을 말하다>(다큐멘터리)에는 캘리포니아 여자 교도소에서 복역하는 여성 재소자들이 등장한다. 남편을 살해한, 그러나 그녀들 역시 남편의 오랜 폭력에 시달려온 피해자들이다.

교도소 안에서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폭력에 맞서는 여성재소자 모임'은 남편 살해의 단편적 사실만 고려된 채 1급 혹은 2급 살인혐의를 쓰고 20년 이상 감옥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모임이다. 젊은 날에 들어와 백발의 할머니가 되었다. 여전히 과거 남편과의 어두운 관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성들은 이 모임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나누며 연대감을 형성한다. 감옥에서 생겨난 이 모임은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며 미국 내에서 폭력피해 여성들을 위한 법률을 개정하고 인식을 개선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상영작 <버진>
많은 이들이 폭력피해 여성들에게 묻는다. "왜 맞으면서 계속 함께 사냐"고. 국내외 불문하고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평소에는 좋은 사람이다. 내가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깊이 들어가보면 폭력에 노출된 여성들은 점차 무기력해져 자신조차 돌볼 수 없는 심리 상태로 접어든다. 친구와의 관계 유지도 어려워 주변에 자신의 문제를 의논할 사람이 부재하다. 완전히 격리된 상태. 폭력의 강도가 심해질수록 점점 더 남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궁지에 몰릴수록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여성들이 생겨난다.

이별을 요구하는 여성에게도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폭력피해 여성이 남자친구나 남편을 떠난 후 살해될 가능성이 75%로 올라간다는 통계를 내놓은 바 있다. 이른바 '이별 폭행'이다. 국내에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지난해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신문기사를 토대로 조사한 결과, 지난해만 70명의 여성이 남편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밝혀졌다. 2010년 7월까지 53명의 아내가 살해당했고 26명은 간신히 살아남았다고 한다.

<여성인권영화제>에는 공모를 통해 선정된 네 편의 작품도 상영됐다. <꽃님이> <놈에게 복수하는 법> <요쿠르트 아줌마> <파마> 등이다. "여성 캐릭터의 내러티브가 풍성해졌다. 공모 당선작은 캐릭터가 분명하다. <파마>는 '파마'라는 한국 여성의 상징적인 이미지를 강요당하는 이주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고, <꽃님이>에는 세상의 편견에 거칠게 소리 지르며 돌파해가는 여성의 모습이 담겨 있다. 잊혀진 가수에게 그 이름을 상기시켜주는 <요쿠르트 아줌마>, 성폭력 피해 당사자인 감독이 가해자에게 사과를 받기 위한 과정을 고스란히 필름에 담은 <놈에게 복수하는 법>도 진실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침묵을 말하라>의 올리비아 클라우스 감독은 이 제목을 에이브러햄 링컨의 명언에서 모티프를 얻었다고 고백한다. "투쟁할 때 침묵하는 것은 사람을 겁쟁이로 만든다. (To sin by silence when we should protest makes cowards of men)" 아픔과 고통을 공유하는 것, 그것이 온전한 해결책일 순 없지만,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다.


공모 당선작 <꽃남이>
상영작 <수진들에게>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