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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아트는 '숭고'한 예술이다

[미디어아트프리즘] 빌 비올라, 비디오 매체 활용 언어의 범위를 넘어선 기호들 표현
  • 티치아노,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 사랑'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19세기까지 회화는 보는 대상이 아닌 읽는 텍스트로 존재했다. 중세시대의 회화를 보면 그림 속에 있는 이미지들은 각각 특정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성모 마리아의 '수태고지'에서 난데없이 발견되는 백합이 순결을 의미하는 것이든지, 비둘기가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그러하다.

그림에 담긴 이미지는 일종의 기호인 셈이며, 이러한 이미지 기호를 흔히 '도상'(icon)이라고 부른다. 중세의 성화를 성상화 혹은 이콘화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렇게 충분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미술사가들이 그림을 단지 보는 대상이 아닌, 해독해야 할 기호로 보는 해석학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회화에 대한 해석학적 입장의 정점을 찍은 사람은 아마도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일 것이다. '도상해석학'(iconology)이라고 부르는 그의 해석학적 방법론은, 지적인 독자만이 난해한 책을 독해할 수 있듯이 전문가만이 회화의 도상에 숨은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해 있다.

가령 티치아노의 그림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 사랑'은 미를 상징하는 비너스, 사랑과 탄생을 상징하는 큐피드, 신성을 상징하는 향, 허영을 나타내는 보석함 등의 기호적인 도상들로 가득 차 있다.

  • 피카소, '황소머리'
파노프스키는 이 그림에서 이러한 기호들이 마치 문장을 이루는 단어들처럼 매우 치밀하게 조합되어 있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그는 이 기호들의 체계가 의미하는 바는 세속과 종교적 신성함이 하나라는 신플라톤주의의 철학이라고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이렇게 기호로 이루어진 텍스트를 읽어낼 수 있는 자만이 이 그림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파노프스키의 도상해석학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은 20세기 이전의 회화에 한에서이다. 20세기 이후의 회화는 더 이상 어떠한 확고한 의미의 해석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화의 이미지들이 언어 기호로 번역될 수 있다는 생각은 그레마스와 같은 구조주의 언어학자들에게 신념과도 같은 것이다. 이들은 애초에 기호의 의미란 텍스트 자체의 내재적인 산물이라고 보기 때문에 이미지를 언어로 환원할 수 있다. 가령 피카소의 작품 '황소머리'를 보면 황소의 머리는 자전거의 핸들과 안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들이 이 작품을 보면서 황소머리를 연상할 수 있는 것은 핸들과 안장의 배치효과 때문이다. 말하자면 핸들과 안장의 의미는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간의 배치에 의한 구문론적 효과에 의해서 결정된다. 따라서 소쉬르 이후 그레마스나 벤베니스트와 같은 구조주의 기호이론가들은 기호가 텍스트의 내재적 효과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기호학자 퍼스(Charles Sanders Peirce)는 기호에 대한 정반대의 견해를 나타낸다. 그에 따르면 기호의 의미란 텍스트의 내재적 효과가 아니라 항상 '바깥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때 바깥이란 텍스트의 바깥에 있는 현실세계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기호란 항상 현실세계의 흔적을 담고 있는 것이다.

  • Eill Viola, 'Acceptance'
퍼스가 보기에 이미지와 상관이 있는 '도상'이라는 기호는 바로 이러한 현실의 흔적을 반드시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가령 사과라는 도상은 어떤 방식으로든 사과라는 현실의 이미지와 상관관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구조주의와 퍼스의 기호에 대한 이러한 접근방식의 차이는 기호 자체를 다르게 여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호의 의미가 텍스트의 내재적인 체계에 의한 산물이라는 구조주의와 달리 퍼스는 기호 자체가 현실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기호가 현실세계의 정보를 담기 때문에 반드시 명확한 의미로 해석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즉 현실 자체가 어떤 고정된 의미를 지니지 않고 무한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듯이, 현실 자체의 흔적을 담은 도상기호는 그 의미가 얼마든지 무한하게 해석될 수 있다.

기호에 관한 구조주의와 퍼스의 충돌은 뜻밖에도 영화이론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구조주의 언어학에 바탕을 둔 크리스티앙 메츠(Christian Metz)는 영화의 기본적인 의미단위를 쇼트로 보았다. 영화의 쇼트란 언어에서의 1차 분절, 즉 가, 차, 달 등과 같은 음소에 해당된다. 언어에서 의미를 지니는 기호가 되기 위한 최소 단위가 음소인 셈이다.

반면 2차 분절에 해당되는 ㄱ, ㄹ, ㅏ 등의 형태소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므로 기호가 아니다. 메츠는 영화에서 프레임이 이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퍼스의 기호론에 바탕을 둔 파졸리니(Pierre Passolini)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그는 프레임 자체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프레임에는 현실의 무수한 이미지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록 영화의 이야기 구조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해도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파졸리니가 보기에 영화는 이미지의 기호이기 때문에 오히려 언어기호처럼 반드시 고정된 의미를 전제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영화에서 이미지들은 이야기 전개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결코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야기 구조로 볼 때 해석되지 않을 따름이다.

파졸리니의 관점을 따르면 결국 영화야말로 언어와 다른 기호를 제시하는 매체인 셈이다. 그리고 이야기에 포섭되지 않는, 따라서 언어로서는 도저히 표현되지 않는 무궁무진한 이미지들이 영화에서는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 기호들을 전통적인 텍스트 해석 방식으로 읽어낼 수는 없다.

말하자면 이 기호들은 언어화되지 않는, 언어의 범위를 넘어선 기호들인 셈이다. 굳이 철학적 용어를 빌자면 '숭고'의 기호들인 셈이다. 숭고는 우리의 언어나 사고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 즉 언어로 표현되는 것을 거부하는 초월적인 기호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파졸리니에 따르면 영화라는 매체는 이렇게 숭고한 기호들을 발산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주로 비디오 매체를 활용하는 빌 비올라(Bill Viola)의 작업은 바로 이렇게 언어로 도달하지 못하는 숭고한 기호들을 표현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의 작업은 주로 비디오 매체를 활용하지만 결코 서사적인 이야기를 만드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작업이 나타내는 특징은 장면들을 연결하여 하나의 커다란 텍스트로 구성하려는 순간 그러한 시도가 좌절당하고 만다는 사실에 있다.

말하자면 그의 영상 작업은 처음부터 통합적인 텍스트에 있지 않다. 반대로 관객은 모든 의미화가 난파되는 그 지점에서 언어나 서사로 통합할 수 없는 일종의 '숭고'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백남준의 제자이기도 하였던 그의 작업은 이런 맥락에서 텔레비전이라는 매체를 선(禪)의 경지와 관련짓고자 하였던 백남준의 비디오 예술 작업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텔레비전이라는 영상매체는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아니 언어라는 기호로는 도저히 환원될 수 없는 영상을 담은 매체라는 특성은 그것이 언어 기호를 넘어설 때 발생한다.

상업영화가 영상을 언어기호에 한정하려는 경향이 있다면, 비디오 예술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간다. 빌 비올라는 오늘날 비디오 예술이 나아갈 그 방향을 제시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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