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3D디자인 평면 한계극복 '구겐하임 미술관' 등 탄생

프랭크 게리, 네덜란드 빌딩
영화의 역사는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열차의 도착>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오늘날 영화라는 장르의 특성에 비추어 볼 때 이 작품이 영화사의 서막으로 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왜냐하면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는 그저 열차가 도착하여 사람들이 내리는 광경을 아무런 편집 없이 촬영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아무런 시나리오나 서사, 혹은 콘티도 없이 만들어진 동영상으로 볼 수도 있다.

조르주 멜리에스의 영화 <달나라로의 여행>은 영화가 편집의 예술이라는 말을 정착시킨 작품이다. 그의 영화를 통해서 영화는 단순히 찍는 예술이 아닌 편집예술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멜리에스의 이 영화는 지금 보아도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가 영화를 편집예술로 승화시킨 계기는 매우 우연한 것이었다.

어느 날 거리에서 영화를 찍던 중 필름이 다 떨어져 필름을 갈아야 하였다. 그 사이 여주인공은 카메라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후에 찍은 필름을 영사하여 보다가 주인공이 사라져서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이 시간적 경과를 나타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무수히 많은 쇼트들로 나누어 하나의 영화로 편집할 경우 예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달나라를 가보지 않고도 달나라의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마법과 같은 편집의 덕택이었다. 그렇게 해서 영화는 시간과 공간을 마음대로 재구성할 수 있으며, 상상의 공간과 현실의 공간 혹은 상상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을 중첩시킬 수도 있었다. 한 마디로 멜리에스는 영화가 지닌 매체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다.

프랭크 게리, 구겐하임 미술관
이렇게 편집을 통해서 만들어진 영화의 새로운 시공간적 질서는 다른 분야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문학의 사례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의식의 흐름으로 표현되는 버지니아 울프나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에서도 현실과 상상의 공간 혹은 현실의 시간과 상상의 시간이 중첩되고 있다. 이는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서사구조의 탄생을 의미하거나 혹은 아예 전통적인 의미에서 서사구조의 파괴를 의미한다. 이러한 새로운 서사구조는 영화에서는 매우 일반적인 것이다.

분명한 인과관계를 규명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소설형식과 영화라는 매체의 탄생 사이에는 분명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추측이 충분히 가능하다.

건축 디자인의 경우에도 디지털 매체가 가져온 근본적인 변화가 분명하게 존재한다. 컴퓨터가 처음 건축 디자인에 사용되었을 때, 사람들은 컴퓨터가 이전보다 디자인 작업을 좀 더 편하게 만들어주는 것으로 취급하였다.

컴퓨터를 활용한 디자인을 사람들은 말 그대로 컴퓨터의 도움을 받는 디자인(CAD, Computer Aided Design)으로 생각하였다. 고속전철이 단지 속도가 빨라진 열차인 것처럼, 컴퓨터 디자인은 과거의 디자인보다 단지 더 편리한 디자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리노, 마야, 캐티아, 폼지 등의 3D 디자인 프로그램들이 본격적으로 활용되면서 컴퓨터는 그저 기존의 디자인 작업을 더 편리하게 만든 장치에 머물지 않는다. 3D 디자인 툴의 사용은 건축의 디자인 과정뿐만 아니라 건축 디자인의 성격 자체를 바꿔놓았다. 디지털 기술이 사용되기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건축물뿐만 아니라 건축 디자인의 과정 자체가 바뀐 것이다.

디지털 디자인이 도입되기 이전에 건축 디자인은 도면을 활용한 활동에 제한되었다. 도면을 통한 디자인은 2차원적인 평면에 건축의 형태를 디자인하는 것이며, 직선자와 컴퍼스를 활용하여 규칙적인 형태를 만드는 것에 제약되었다. 디자인이 2차원의 평면에 제한될 경우 건축물의 형태는 매우 제한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주어진 범위에서나마 과감한 형태의 건물을 디자인할 경우 역학적인 한계에 동시에 봉착해야 했다. 말하자면 디자인은 도면에서의 표현적 한계와 역학적 한계라는 두 가지 제한사항을 넘어설 수 없었다.

하지만 디지털 디자인은 상대적으로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 건축 디자인에 상상력이 개입할 가능성을 만들었다. 그것은 건축에서 다이어그램(diagram)의 부각으로 나타난다. 다이어그램이란 건축 디자인에서 실제 시공에 사용되지 않는 갖가지 도면을 의미한다. 디지털 건축 디자인 이전에 건축가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 다이어그램은 스케치나 수채화 등의 방법이다.

스케치나 수채화를 통한 이미지는 그 자체로는 직접 시공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아무리 시공을 위한 도면이 아니라 하더라도 전혀 비현실적인 건물의 형태를 그릴 수는 없을 것이다. 다이어그램은 제도가 아닌 상상에 기초한 그림이지만 그 그림은 단지 그려질 건물을 예측하는 데 불과한 것으로 건축 디자인 자체에 필요한 요소는 아니었다.

디지털 건축 디자인 이후 건축에서 다이어그램의 역할이 크게 부각되었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3D 디자인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디자인할 경우 상상으로 그리는 그림이 곧 시공을 가능하게 하는 도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공학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상상의 그림이 곧 시공을 위한 도면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3D로 도면을 만들 경우 직선이나 규칙적인 곡선이 아닌 불규칙한 곡면들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디지털 건축 이전에 사용되던 도면을 통한 디자인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불규칙한 곡면을 가진 벽을 도면으로 그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높이에 따라서 면적이 불규칙하게 변하므로 가령 평면도의 경우 수천 개의 평면도가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많은 평면도를 그리는 것이 비현실적일뿐더러 그 많은 평면도를 보고 시공을 한다는 것도 현실적이지 않다.

3D를 이용한 디지털 디자인은 불규칙한 곡면이나 비정형적인 표면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물론 이렇게 디자인한 불규칙한 곡면을 시공하기 위해서는 디자인에 상응하는 시공능력이 가능해야 한다. 이른바 컴퓨터 절삭(CNC, Computer Numeric Cutting)은 컴퓨터로 디자인한 불규칙한 곡면에 맞게 건축 재료를 절삭하고 가공할 수 있게 만든다. 오늘날 디지털 디자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건축물의 표면을 이루는 강판이나 건축 재료는 컴퓨터에 의해서 절삭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건축 디자인은 점차 공학적인 마인드가 아닌 예술적 마인드를 필요로 하게 된다. 말하자면 엄격한 도면을 만드는 공학적인 능력보다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다이어그램을 만드는 능력이 더 필요한 것이다. 프랭크 게리(Frank Gehry)의 건축 디자인은 이를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이다.

그가 디자인한 빌바오에 위치한 구겐하임 미술관은 대표적인 디지털 건축물이다. 얼핏 보아도 그 외관이 예사롭지 않으며 과거의 반듯한 건축물과는 매우 다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건물이 물고기의 표면을 본 따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게리는 어린 시절 부모님과 자주 다녔던 생선 시장에 대한 남다른 기억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기억을 바탕으로 그는 물고기 형태의 다이어그램을 만들고 이를 건축물로 디자인한 것이다.

프라하에 위치한 ‘네덜란드 빌딩’은 게리가 다이어그램을 바탕으로 창조한 또 다른 디지털 건축 디자인의 사례이다. 이 빌딩은 흡사 남녀 한 쌍이 춤을 추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댄싱 빌딩이라는 별칭을 지닌 이 건물은 바로 게리가 남자가 여자의 허리를 휘감고 춤을 추는 듯한 장면을 상상하면서 디자인한 데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춤추는 장면이 곧 다이어그램이 된 것이다. 디지털 디자인은 건축에서 다이어그램의 역할이 부각되는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박영욱 숙명여대 교양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