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보우 아시아: 세계 미술의 진주, 동아시아' 전

아나딩 포클롱 '열리기를 기다리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무심한 듯 하지만 어딘가 신경을 쓰고 있는 표정들이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지만, 별 기대는 없는. 눈에 익다. 우리도 매일 겪는 출근길이다.

필리핀 작가 아나딩 포클롱의 '열리기를 기다리며'는 지하철 플랫폼에 서 있는 사람들을 찍어 라이트박스에 붙인 작품이다. 스쳐 지나갔던 일상의 단면이 의미심장하게 빛난다. 끝없이 기다리고 움직이는 현대인들의 모습이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레인보우 아시아: 세계 미술의 진주, 동아시아> 전에는 지역적 특수성에서 현대사회의 보편적 특성을 발견해낸 아시아 미술이 소개된다. 특히 세계 미술계에서 중국과 인도에 이어 주목받고 있는 동남아시아 미술이 집중적으로 초청됐다.

현대적 삶 반영한 동남아시아 미술

필리핀과 태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공통점은 한때 서구의 식민지였으며 급격한 근대화 과정을 겪었다는 것. 정치, 경제적 급변은 유동적인 사회 분위기를 낳았다.

이수영, 리금홍 '가리봉동 프로젝트'
속도가 빠르고 이주자가 많으며 다양한 문화가 만나고 섞이는 오늘날 동남아시아 사회의 모습은 세계화된 삶의 조건을 상징한다. 동남아시아 미술이 현대적 삶을 성찰할 수 있는 모티프가 된 것도 그 때문이다.

<레인보우 아시아: 세계 미술의 진주, 동아시아> 전의 작품들은 작가 각자의 지역의 역사적 기억을 끌어안는 동시에 세계 보편의 문제를 펼쳐 보인다. 작가 자신이 이주자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국경을 넘어 사유하는 경우도 많다.

일본에서 태어나 베트남에서 활동하고 있는 준 응우옌 하치시바 작가는 달리기라는 퍼포먼스를 통해 우리의 삶을 빗댄다. 그는 지구 지름에 해당하는 12756.3Km의 거리를 달리며, 그 여정을 영상으로 기록했다.('숨 쉬는 것은 자유 12756.3')

작가는 말한다. "우리는 사냥하기 위해 달려야 한다. 싸우기 위해 달려야 한다. 경쟁하기 위해, 정복하기 위해, 길들이고 도망치고 살아남기 위해, 이동하기 위해, 그리고 이주하기 위해 달려야만 한다. 달리는 것은 인류에게 주어진 필연적인 힘이다."

영상 속 그의 고군분투에는 이주 노동자와 난민은 물론, 지금 여기는 지나가는 곳이라고 여기며 더 나은 삶을 향해 전전하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 겹쳐진다.

뮌의 '조각상 되기'
동아시아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도네시아 작가 티타루비는 급격한 근대화 과정에서 불거진 인권 문제를 돌아본다. 경제성장을 위해 질주해 온 아시아 사회에서 가장 취약했던 것이 바로 인권 문제. 제대로 돌보아지지 않은 약자들 중 작가가 초점 맞추는 이들은 여성이다.

남성의 신체에 여성성을 뜻하는 양단으로 지은 옷을 입힌 작품 '비단 군대'에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작가의 기원이 담겼다. 그 자체가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를 변화시키려는 정치적 발언이기도 하다.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나 싱가포르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 셔먼 옹은 싱가포르 사회의 모습을 포착한 영상 작품 '가뭄 속의 홍수'를 선보인다. 물이 부족해진 가상의 미래를 배경으로 자신들에게 닥친 위험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여전히 평온하지만 관객이 보기에 그 일상은 위태롭다. 우리의 삶도 저런 정보 통제의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닐까.

김수자의 '보따리 트럭 _이민자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작품 속 싱가포르 거주자들이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힌두어, 인도네시아어, 이탈리아어, 타갈로그어, 중국어, 독일어까지 나온다. 이는 싱가포르 사회의 다문화성을 드러낸다.

작가는 "살고, 죽고, 사랑하고, 기도하고, 용서하고, 열망하는 등의 인간 조건과 우리가 우리의 삶과 환경을 어떻게 조직하고 조절하는가에 늘 관심을 가져 왔다.

다른 문화들과 사람들을 마주할 때면 그들이 각각 안정된 사회적 환경을 건설하기 위한 생존 체계를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한국의 경계 탐색하는 미술

동아시아 미술의 맥락에서 유동성과 다문화성을 탐구하는 한국 작가들의 작품도 전시됐다. 미국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김수자 작가의 퍼포먼스 작업 '보따리 트럭 이민자들'은 현대인의 유동적 삶을 위로한다. 작가는 원색의 이불보 보따리를 가득 짊어지고 오가며 인파 속에 고요한 지점을 만들어낸다.

셔먼 옹의 '가뭄 속의 홍수'
이수영, 리금홍 작가는 한국사회 내 경계지대인 가리봉동 문화의 발생 경로를 추적하는 작업 '가리봉동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중국 조선족들이 모여 살면서 중국 문화도, 한국 문화도, 하다못해 연변 문화도 아닌 특유의 문화가 생겨난 이곳을 속속들이 기록하고 기억한 프로젝트다. 가리봉동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조리법을 받아 적고, 그 기원을 찾아 연변으로 떠난 여정이 공개된다.

작가 그룹 뮌의 작품은 동남아시아와 한국의 접점에 있다. 한국사회에 거주하는 동남아시아인 3명을 찍은 영상 작업 '조각상 되기'는 한 지역 내에서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전시는 12월 5일까지 열린다. 02-580-1300


티타루비의 '비단 군대'
준 구옌 하츠시바의 '숨 쉬는 것은 자유 12756.3Km'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