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in the Kitchen] (9) 파스타 영화ㆍ드라마ㆍ소설서 다양한 변주, 하루키 소설 이후 문학적 소재

제임스 솔터와 케이 솔터 부부가 쓴 <위대한 한 스푼>은 서양의 웬만한 음식에 관한 기원과 관련 일화, 조리법을 소개한 책이다. 이 책에 실린 파스타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1800년대 초에 세몰리나 반죽을 거푸집에 넣고 누르는 기계가 개발되면서 상업적인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고 (…) 생 파스타라고 해서 말린 파스타보다 맛이 뛰어난 것은 아니다. 파스타의 질과 맛은 철저하게 제조업체에 따라 달라진다.'

제조업체와 조리장의 내공에 따라 음식의 맛과 품위가 결정된다는 점에서 우리의 국수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이 두 음식이 우리나라에서 갖는 지위는 다른 듯 싶다. (소개팅이나 맞선 볼 때 '생면 파스타' 집에는 가도 '생 칼국수' 집에는 안 가지 않는가.) 영화, 드라마, 소설이나 시 등 국내 대중문화 작품에서 등장하는 파스타는 신세대(이 말이 나온 지가 언제였던가)의 세련된 감각을 상징하는 음식이었는데, 아마 그 시작은 그의 소설이었을 것이다.

'이게 다 하루키 때문이다.'

파스타에 관한 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는 왜 스파게티를 삶을까?

신세대란 말이 생길 때쯤일 게다. 하루키가 우리 대중문화 아이콘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거대담론이 사라진 90년대, 무라카미 하루키는 하나의 현상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선은 사라졌고, 추상적 담론을 개인의 이야기로 풀어낸 하루키 소설은 우리 문학계의 '스타일'을 바꿔놓았다. 고대 김춘미 교수는 <한국에서의 무라카미 하루키>란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루키 문학의 수용양상을 밝히는 것은 90년대 한국문학 연구에 필요불가결한 작업이다.'

청년기의 화자, 대중 취향의 반영, 농도 짙은 감정의 묘사 등 '하루키 표' 소설은 단 번에 읽게 만드는 흡입력을 갖고 있는데, 이 흡입력에 탄력을 붙이는 게 스파게티다. 어느 소설의 어떤 장면이라고 콕 짚어 말하기 곤란할 정도로 그의 소설에는 스파게티 먹는 장면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하루키 소설'이라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상이 있다. 멜랑콜리하고 쿨한 독신 남자가 주인공으로 나오고, 주로 집에서 책이나 영화를 보며 빈둥거리다가 배가 고프면 혼자 스파게티나 샐러드를 만들어 먹는다.(파스타에 수백, 수천만 종류가 있다지만, 하루키는 스파게티만 주구장창 삶아 댄다.) 이 남자는 어느 날 밤 재즈가 흐르는 고급 바에서 묘한 여자와 술을 마시며 대화를 주고받는다. 주로 사건은 여기서 시작된다.

소설 속 스파게티는 인물의 캐릭터를 만드는 장치로 쓰인다. 스스로를 위해 정성껏 요리를 할 만큼 자기애가 강하지만, 그 요리를 혼자 먹어도 쓸쓸해하지 않을 만큼 인물들은 개인적이다. 작가가 이런 의도로 스파게티를 계속 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예 스파게티를 제목에 건 단편은 이런 인상에 종지부를 찍고 있다.

'기본적으로 나는 혼자서 스파게티를 삶고, 혼자서 스파게티를 먹었다. 가끔씩은 누군가와 둘이서 먹을 때도 있었지만 혼자서 먹는 것이 훨씬 좋았다. 스파게티라는 것은 혼자 먹어야만 될 요리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유 같은 건 잘 모른다. 스파게티에는 언제나 홍차와 샐러드를 곁들였다. 그것들을 탁자 위에 깔끔히 늘어 놓고, 신문을 옆 눈으로 보면서,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나는 혼자 스파게티를 먹었다.' (단편 <스파게티의 해에> 중에서)

둘이서 더 잘해요, 우아하게 밥 먹기

하루키의 스파게티가 '개인화된 현대인'의 전형을 그리고 있다면, 우리 대중문화에서 파스타는 앞서 말했듯 세련된 감성의 상징처럼 쓰이는데, 이 '세련됨'은 때로 사랑의 메신저로, 때로 자본주의 시대 물질적 풍요로움이 만든 고급 취향으로, 때로 자기애로 변신한다.

영화 <시월애>의 한 장면은 파스타에 대해 갖고 있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일마레(원래 '바다'라는 뜻이지만, 이 말은 한국에서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연상시킨다)를 배경으로 성현(이정재)과 은주(전지현)가 2년의 시간 차를 두고 편지로 사랑을 나눈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그들은 요리를 하며 사랑의 상실을 잊는다. 성현은 은주에게 스파게티 만드는 법을 편지로 가르쳐준다. 여기서 파스타는 삶을 긍정하게 되는 기쁨의 촉매제다.

"우울할 땐 스파게티 요리를 하세요. 스파게티가 잘 익었는지 알아보려면 힘껏 던져요. 잘 붙으면 훌륭하게 익은 거예요."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 후, 성현은 스파게티 면을 벽에 던지고 이어 은주도 따라서 벽에 스파게티 면을 던진다.

영화나 드라마가 파스타를 '사랑의 메신저'로 사용한다면, 소설 속 파스타는 세련된 감각과 입맛을 상징하는 메타포로 종종 등장한다. 이 취향은 자본주의가 가져온 물질적 풍요를 기반으로 한다.

정이현의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2000년대 여성의 연애를 통해 후기 자본주의 시대를 그리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조건 좋은 남자 만나 결혼에 이르는' 것을 사랑이라 여기는데, 작가는 이 여성의 파국을 통해 사랑이란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있다.

여대생 유리는 '서울에서 제일 좋은 대학의 의대생인데다 잘생기기까지 한' 상우와 데이트를 한다. 두 사람은 베니건스에서 샐러드와 파스타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비디오방에 간다. 유리는 새침한 척 상우와 키스하지만, 팬티만은 끝까지 사수한다. 상우는 결정적 순간 '베팅해 볼 만한 남자'이고, 순결은 그녀가 쥔 마지막 카드기 때문이다.

'칙릿'으로 대표되는 한국형 연애소설에서 파스타 먹는 장면은 하루키 소설만큼이나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이때 파스타는 인물들의 자기애를 드러내는 상징으로 쓰인다.

백영옥의 장편 <스타일>은 패션잡지 기자 이서정을 통해 자본주의 시대 사람들의 욕망을 그린다. 서정의 동료들은 연봉 3000만 원 받으면서 아우디를 몬다. 사글세 사는 주제에 BMW오토바이로 폼을 잡는다. 레스토랑 취재를 하며 '식어버린 스테이크나 불어터진 파스타, 죽이 된 리조또를 먹는 게' 업무인 주인공은 동료들의 그런 표리부동에 냉소를 보내진 않는다.

그녀 역시 '프랭크 뮬러' 시계, '마크 제이콥스' 핸드백, 킹크랩 살을 올린 수제 페투치네(파스타의 일종)에 감동받는 평범한 현대 여성일 뿐이다.

파스타로 상징되는 물질적 욕망을 극단적으로 드러낸 소설이 송혜근의 <이태리 요리를 먹는 여자>다. 소설은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젊은 여자가 우연히 엄청난 부자인 중년 남자를 만나 이태리 요리에 심취하게 되면서 현실을 망각한 채 댄디족이 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중년의 남자를 떠나 보내고, 레스토랑 웨이터 안토니를 유혹하며 여자는 음식을 주문한다.

"시저스 샐러드하고, 홍합과 페스토 크림으로 만든 엔젤헤어(파스타의 일종)를 주세요. 시저스 샐러드는 로매인레터스를 자르지 말고 통째로 주세요. 싱싱한 로매인레이터스는 통째로 아작아작 씹어야 제 맛이 나거든요."

한국 식당에서 파스타를 시킨 테이블을 관찰해 보면 크게 두 분류로 나눠진다. '여자들 모임'이거나 남녀커플이다.

파스타를 혼자 먹거나 남자들끼리 먹는 테이블은 거의 없다.(한국에서 남자끼리 파스타 먹다가는 십중팔구 오해받기 십상이다) 하루키가 혼자서도 정성껏 밥 먹기 위해 스파게티를 삶는다면, 한국인은 자신의 세련된 입맛을 만인 앞에 드러내기 위해 파스타를 먹는 것 같다. 파스타 접시를 앞에 둔 한국인들은 말한다.

둘이서 더 잘해요, 우아하게 밥 먹기.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