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in the Kitchen] (11) 김치 한민족 대표 음식서 세계인의 건강식으로 주목

'김치가 아니라 금(金)치다.'

배추값이 폭등할 때마다 한국인은 이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얼마 전 이 말은 수사나 상징을 넘어 현실이 됐는데, 배추 한 포기에 1만 5000원을 호가했을 때, 우리 국민은 배추값 뉴스로 아침을 열고 배추 값 안정을 주제로 토론하는 시사프로그램을 보며 잠을 청해야 했다.

음식칼럼니스트 황교익은 얼마 전 칼럼 <우리들만의 김치 집착 증후군>에서 배추 파동을 이렇게 정리했다.

'김치는 우리 민족에게 반찬용 채소절임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한민족의 우수성을 담보하는 음식이며, 전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자랑스러운 웰빙 음식으로 평가한다. 반찬으로 가장 좋은(저렴하고 맛있는) 음식, 즉 우리 민족의 기호를 넘어 세계인의 기호도 충족시킬 수 있는, 아니 충족시켜야 하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김치가 우리 밥상에서 잠시나마 사라지는 걸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것이 바로 배추 사태의 본질이다.'

그는 죄가 없다

칼럼니스트가 '현실을 너무 냉소적으로 본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앞서지만, '김치=한국인'이란 집단 무의식이 우리 머릿속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는 건 사실인 듯하다. 한 사회의 집단 무의식은 때로 민족이란 이름으로 발현되곤 한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개념을 살짝 비틀어 말하자면, 한민족은 김치란 명제 아래 포섭되는 상상의 공동체가 아닐까?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김치에서 찾는 '외국인'의 시선이 나온다. 한국전쟁 상황에서 남한에 오게 된 미국인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당시 한국은 '똥냄새, 김치냄새 나는 나라'다.

'「맞아, 이 나라는 똥냄새와 김치냄새로 범벅이 된 나라야. 똥냄새도 지독하지만, 그 김치냄새! 그 숨막히고 머리까지 띵한 그 썩는 냄새나는 걸 매끼 먹고 살다니, 정말 야만인은 야만인들이야. 그들은 온몸으로 그 썩는 냄새를 풍겨대지 않느냔 말야.」

「그러니까 일본에서 들었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아. 거 뭐랬지? 무지하고, 더럽고, 게으르고, 그리고…….」

「거짓말 잘하고, 도둑질 잘하고, 그 담에가……. 응 그렇지 무질서하지.」' (조정래, <태백산맥> '똥냄새 김치냄새 나라')

온갖 양념이 섞인 김치 냄새는 60년 전과 지금이 다르지 않을 테지만, 한국의 경제성장과 이와 비례해 높아진 영향력에 힘입어 김치는 '세계가 주목하는 건강식'이 됐고, 김치 냄새는 발효음식 특유의 향으로 소개된다. 치즈의 구린내가 '풍미'란 말로 우아하게 탈바꿈하는 것처럼.

올 초 개봉한 영화 <식객2- 김치전쟁>은 김치에 대해 달라진 인식을 보여준다.

영화는 한국 대통령이 반한 맛의 김치가 일본 총리의 수석요리사가 만든 '기무치'였음이 밝혀지면서 시작된다. 이를 만든 요리사는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 천재 요리사 장은(김정은 분)이다. 영화 전편에서 대령숙수의 칼을 차지한 성찬(진구 분)은 장은을 상대로 '한국의 자존심'을 건 김치 경연대회에서 경합을 벌인다.

황교익의 칼럼처럼, 이제 김치는 '민족의 기호를 넘어 세계인의 기호도 충족시켜야 하는' 음식이 됐는데, 이 주도권은 당연히 한민족이 가져야한다는 의식이 이 영화 전반에 깔려 있다. 김치 대 기무치, 한국 토종 주방장 대 퓨전 요리사의 대결 구도는 민족의식의 상징처럼 비춰진다.

김치가 익는 시간

왜 하필, 우리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김치에서 찾으려 하는 걸까? 문학평론가 이어령은 각종 에세이와 비평서에서 김치를 통해 한국의 문화적 특징을 소개한 바 있다. 저서 <생각>에서 그는 "김치가 한국음식을 대표한다는 것은 발효가 한국음식의 기본 밑바탕이라는 말과 같다"고 표현했다.

화식(火食)이 성급한 불의 맛이라고 한다면 발효음식은 시간이 빚어내는 맛이다. 배추를 날것으로 조리하면 샐러드가 되고 불에 익히면 수프가 된다. 그것을 삭혀 먹으면 김치가 된다. 발효음식인 김치는 샐러드 같은 자연의 맛이나 수프 같은 문명의 맛과는 차별화된 제3의 맛을 창출한다.

이어령은 김치의 맛을 '자연과 문명이 조화를 이루고 융합했을 때 비로소 생성되는 통합의 맛'이라고 말한다.

각종 재료가 섞여 한 가지 맛을 내려면 시간이 흘러야 한다. 때문에 김치를 담글 때 중요한 것은 무형의 시간이다. 좋은 재료와 손맛으로 담근 김치가 제대로 된 묵은지가 되려면 김장독에서 인고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숙성과정에서 김칫독 뚜껑을 여는 것은 금물이다. 김칫국물은 배추와 고춧가루, 소금과 마늘이 맛을 위해 분투한 시간의 흔적이다.

시인 오세영은 이런 김치의 특징을 고스란히 글로 옮겼다.

'겉절이라는 말도 있지만/ 김치는/ 적당히 익혀야 제격이다./ 흰 배추 속처럼/ 마음만 고와서는 안된다./ 매운 고춧가루와/ 짠 소금,/ 거기다가 젓갈까지 버물린/ 전라도 김치,/ 김치는/ 맵고 짠 세월 속에서/ 적당히 썩어야만/ 제 맛이 든다./ 누이야,/ 올해의 김치 독은/ 별도로 하나 더 묻어 두어라./ 흰 눈이 소록소록 쌓이고/ 별들이 내려와 창문을 두드리는 어느 겨울 밤,/ 사슴의 발자국을 좇아/ 전설처럼 그이가 북에서 눈길을 찾아오면/ 그때/ 새 독을 헐어도 좋지 않겠니?/ 평양 냉면에/ 전라도 동치미를 곁들인다면/ 우리들의 가난한 식탁은 또 얼마나/ 풍성하겠니?' (시 '김치' 전문)

평양냉면에 곁들인 전라도 김치처럼, 김치는 다른 음식과 함께 먹을 때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느끼한 고기를 먹을 때 기름기를 씻어내고, 입 안을 개운하게 하는 것도 우리 음식 중 김치가 단연 으뜸이다. 때문에 김치를 잘 먹지 않는 사람도 외국 생활을 하다보면 김치 맛이 그리워진다.

우리가 한갓 김치에 제 정체성을 투영시키는 건 아마 이런 이유 일게다. 타자와 관계 속에 제 빛을 발하는 조화성. 지난한 시간을 견뎌 만든 제 3의 맛.

김치의 참맛은 바로 그것이다. 시들고 사그라지고 썩는 시련의 과정을 통해 겉절이는 김치가 된다.

김장철이다. 기다림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김장철 소스리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달프도록 절실하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 나는 홀연히 옥희도 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 그 시절을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박완서 <나목> 중에서)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