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리영희 교수 다시 읽기] 1970~80년대 젊은 세대의 방향타, 사상의 은사 추모 도서전 선보여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며 출판가에서 '리영희 다시 읽기'가 붐을 이루고 있다. 사실에 기반해 날카로운 논리를 선보인 그의 저작은 1970~80년대 젊은 세대의 방향타가 됐다. 고 리영희 선생 저작의 특징, 집필 배경과 출간 당시 사회적 파장, 오늘날 저작이 갖는 의미를 정리했다.

그가 사상의 은사인 이유

"리영희 선생님이 갖고 있는 가장 훌륭한 장점은 독자가 곧 제자가 되는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소설가 서해성 씨는 지난 7일 CBS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리영희의 책을 읽은 이들이면 누구나 공감하는 말이다. 강준만 성공회대 교수는 <한국 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 서문에서 그의 영향력을 이렇게 요약했다.

'멀쩡하던 대학생들이 리영희의 책만 읽으면 충격을 받고 이상하게 변해갔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공부에만 몰두하겠다던 '청운의 꿈'을 내던지고 진실과 인권과 상식의 가치에 입각해 이 사회와 나라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6페이지)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대형서점과 온라인 서점에서 '리영희 추모 도서전'을 속속 선보이고 있다. 사진은 추모 도서전이 진행되고 있는 광화문 교보문고
70~80년대 사회과학 필독서로 꼽히는 그의 첫 단행본 <전논>(<전환시대의 논리-아시아·중국·한국>의 줄임말, 이하 전논)은 1974년 출간됐다.

베트남전에 개입하기 위한 미국의 '통킹만 사건' 조작 사실을 폭로한 대니얼 엘스버그와 그 사실을 보도한 <뉴욕 타임스>의 보도 태도, 권력의 언로 차단과 비밀주의, 자유 억압이 결국 비극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논한 이 책은 이 시대 젊은 지식인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책이 발간된 1974년은 긴급조치가 발동된 해다. 문인 간첩단 사건,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이 연일 보도되던 그 때, 리영희의 저서는 출간 직후 단박에 베스트셀러가 됐다.

1972년부터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있던 리영희 선생은 1976년 제1차 교수재임용법으로 교수직에서 강제 해임됐다. 해직 6개월 만인 1977년 9월, 그는 창작과비평사에서 <8억인과의 대화 : 현지에서 본 중국대륙>을 펴낸다.

편역이었음에도 출간 2달 만에 판매금지 조처를 당했는데 이 조치가 취해지던 날, <전환시대의 논리>의 속편 격인 <우상과 이성>(한길사)이 출간된다. 광복 32돌의 반성, 베트남전 총평가, 냉전과 독일 통일 문제 등을 담은 이 책은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보여준 논의를 한층 더 발전시킨 형태다.

두 책이 나온 직후 리영희 선생은 남영동의 대공분실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검찰에서 다시 조사를 받은 뒤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된다. 두 책이 모두 '해외 공산집단을 고무 찬양'했다는 명목이 기소 이유로 제시됐고, 3년 전 낸 <전논>까지 문제가 됐다. 리영희 선생이 기소된 그날 선생의 어머니는 86세로 사망했고, 그는 2심에서 징역 2년에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는다.

1980년대 들어 리영희는 <80년대의 국제정세와 한반도>(1984년, 동광), <분단을 넘어서>(1984년, 한길사), <역설의 변증-통일과 전후세대와 나>(1987년, 두레)를 잇따라 내며 핵 문제, 통일 문제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는 한편 제3세계로 시선을 넓힌다.

1990년대 동구권은 몰락했고, 소련은 쪼개졌으며, 독일은 통일을 맞았다.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되는 모습을 보며 그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몰락을 인정하게 된다.

그는 <自由人, 자유인 : 리영희 교수의 세계인식>(범우사, 1990)에서 "아무리 의로운 일도 어떤 선에서 멈출 줄 모르면 오만이 된다"면서 "지나온 생의 한 장을 접고 새 삶의 장을 열기에 앞서 잠시 자신을 성찰해야 할 건널목"에 섰다. 그의 성찰은 1990년대 내내 침묵으로 나타난다. 이 책과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1994년, 두레) 등 그의 90년대 저작들에는 당시의 고뇌가 배어 있다.

2000년대 대표작은 문학평론가 임헌영 교수와 대담 형식으로 엮은 회고록 <대화-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이다. 리영희의 삶과 사상의 종합편인 이 책은 2000년대 젊은 독자가 근대 한국의 지식인 모습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됐다.

그의 저작은 2006년 한길사에서 12권의 저작집으로 출간된 바 있다. <전논>에서 <대화>까지 그가 쓴 십수 권의 책을 묶어 편집했고, 1999년 이후 썼지만 책으로 묶이지 않은 원고를 모아 만든 <21세기 아침의 사색>을 마지막 12권에 포함시켰다.

"무엇보다 리영희의 문장에는 지적 태만과 후진성의 징표라고 할 수 있는 쓸데없이 현학적인 표현이 없었다. (…) 실제로 그의 글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문장은 단순한 지적 훈련이 아니라 험한 세월의 굽이굽이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한 양심적인 지식인의 전인격이 뒷받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 리영희 선생을 추모하며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쓴 칼럼 '자유인 리영희'의 한 부분이다. 힘차고 정밀한 문체, 자주적인 사고와 판단력으로 사태의 근저를 집요하게 파헤쳐 진실에 이르고자 한 그의 삶과 저작은 근대 지식인의 표본처럼 읽힌다.

추모 분위기, 출판에도 여파 미칠까?

지난 주 별세 소식이 이어지며 대형서점과 온라인 서점을 중심으로 '리영희 추모 도서전'이 선보이고 있다. 덕분에 잠시 절판됐던 리영희 선생의 책들도 다시 인쇄에 들어간 상태다. 2006년 '리영희 저작집'을 출간한 도서출판 한길사는 서점들의 잇따른 주문으로 다시 인쇄에 들어갔다.

한길사 편집팀 배경진 실장은 "온·오프라인 대형서점을 중심으로 주문이 많은 상태"라며 "현재 계속 주문이 들어오고 있어 주말이 지나야 인쇄 발주 물량을 산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저작집은 2006년 출간 후 지금까지 총 2만 부가 판매됐으며 <우상과 이성>,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가 4쇄를 찍어 저작집 중 가장 많이 판매됐다. 한편 지난주 월요일 출판된 <리영희 평전>은 1쇄 3000부에 이어 일주일도 안 돼 2쇄 3000부를 발주한 상태다.

리영희의 서재에 꽂힌 책은?

이 땅의 수많은 지식인이 고 리영희 선생을 '사상의 은사'로 꼽는다. 그렇다면 정작 그는 어떤 책을 읽으며 '의식'을 만들었을까? 2005년 출간된 <대화>에서 그 이면을 엿볼 수 있다.

1929년생인 그는 국민학교 고학년때 아버지가 주문해서 본 일본작집 <추오고론 中央公論>, <가이조 改造> 등을 읽었고, 경성공업학교에 들어가며 나쓰메 소세키 등의 시대소설과 역사소설, 당시 중학생들에게 유행했던 사무라이 소설을 읽는다.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구나 사이조 야소 등의 시와 바쇼의 하이쿠, 그 밖의 번역된 서양의 시, 유려한 일본어로 번역된 <삼국지>를 비롯해 여러 중국 고전들(…) 코넌 도일의 <셜록홈스>와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 (<대화> 57페이지)

1940년대 식민지 조선인의 책 읽기는 해방 후 다른 지적 풍경으로 이어진다. 이 시기 리영희 선생은 일본·미국·영국·프랑스의 원전을 읽고, 장르소설가 김내성의 <백가면>과 <마도의 향불>, 이광수의 <무정>과 <유정>, 박계주의 <순애보>, 이상과 이효석 등의 문학작품을 읽었다.

해양대학 시절에는 영미문학에 심취해 '콜리지, 브라우닝, 존 키츠, 예이츠, 테니슨 등 빅토리아 시인들과 토머스 칼라일, 조지프 콘래드, 찰스 디킨스, 에머슨, 조지 기싱, 토머스 하디 등 작가들의 작품'(98페이지)을 읽었다.

미국 작품으로 '로버스 프로스트, 워싱턴 어빙, 에드거 앨런 포, 헨리 데이비드 소로' (99페이지)등을 읽었다. 한국전쟁 기간 중에는 '<안네의 일기',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등의 일본어판, 그리고 몇 권의 영어판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들'(144페이지)을 읽었다.

1950년대 합동통신사 기자를 거치며 본격적인 사회과학 독서가 시작된다. '영국 노동당 계통의 주간지 <뉴 스테이츠맨New Statesman>과 보수적인 <스펙테이터Spectator>, 미국의 진보적 주간지 <뉴 리퍼블릭New Republic>을 필두고 미국의 좌파 이론지를 주로 발간하는 먼슬리 리뷰 Monthly Review 출판사의 많은 저작들과 일본 이와나미 출판사에서 발행되는 자유주의적ㆍ진보적ㆍ사회주의적 성격의 서적들'(195페이지) 그리고 '장 폴 사르트르가 편집인을 맡고 있는 <레 탕 모데른>' 등은 그의 시각을 만든 대표적인 자료들이다.

영국의 해럴드 J. 라스키의 <근대국가이론>을 비롯한 그의 대부분의 정치·사상·철학 관계 저서, J.R힉스의 <세계경제론>, 콜의 <사회주의 경제학>, 당시 한창 유명했던 모리스 돕의 <정치경제학과 자본주의>, 라이트 밀스의 <파워엘리트> 등 당대를 풍미한 사회과학 서적 역시 그의 서재에 꽂힌 책들이었다.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는 올 초 출간된 <리영희 프리즘>을 통해 "구술(자서전 <대화>)에서 등장하는 책 읽는 사람은 단지 리영희라는 개별자가 아니다. 책의 목록과 구술 행위 자체가 한국 문화사, 지정사의 한 단면을 압축하여 보여주고 있다"고 평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