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발상 미니멀리즘 예술, 디지털 언어에도 적용될까

비트겐슈타인
20세기 철학의 한 새로운 지평을 연 의 책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1922)는 그가 확고한 것이라고 믿었던 하나의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 전제란 다름 아닌 언어가 곧 세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논리적 그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가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은 언어의 구조와 세계의 구조가 논리적으로 일치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가령 언어의 경우 단어가 모여서 하나의 단일한 문장을 만든다. 이것을 그는 원자명제(atomic proposition)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원자명제들이 모여서 복합적인 문장, 즉 복합명제를 이룬다.

이 과정은 정확히 현실세계의 논리적 구조와 일치한다고 믿는다. 단어는 하나의 사물과 대응하고, 원자명제는 사물들이 맺는 관계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장 기본적인 사실(은 이를 '사태'라고 부른다)이 되며, 현실의 복잡한 세계는 이러한 복잡하게 얽혀서 이루어진 것이다.

어찌 보면 순진할 정도로 소박해 보이는 이 가정은 사실 엄청난 힘을 지니는 것이다. 언어와 세계가 정확하게 대응의 관계를 지닌다면, 언어를 통하여 얼마든지 세계를 정보화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Mona Hatoum, The Light at the End, 1989
실제로 프레게는 언어 명제가 충분히 수학적 기호로 나타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명제를 하나의 함수로 보고 그것을 수학적으로 기호화하였다. 말하자면 이 말하는 원자명제는 얼마든지 수학적 기호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원자명제가 수학적 기호로 처리될 수 있다면, 원자명제들을 결합시키는 기호를 통해서 얼마든지 현실의 복잡한 세계에 대응하는 복합명제가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즉 현실은 수학적인 기호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발상들이야말로 컴퓨터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 조건이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컴퓨터의 출현이 단순히 하드웨어 기술의 발전에 의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컴퓨터의 탄생은 세상의 모든 것을 정보로 환원시키는 수학적 가공 능력의 출현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세상은 정보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정보는 수학적인 데이터로 정량화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과 더불어 컴퓨터가 탄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세상은 데이터인 셈이다.

데이터를 보다 세밀하고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면 지닐수록 컴퓨터가 산출하는 데이터는 현실 자체와 구분이 되지 않을 것이다.

Donald Judd, Untitled, 1990
의 발상과 미니멀리즘 예술이 어떤 면에서 일맥상통하다는 주장은 다소 의아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호화된 원자명제로부터 그것들의 임의적 구성을 통하여 얼마든지 복합적인 명제가 연역될 수 있다는 발상은 동일하다.

저드나 앙드레의 조각물은 매우 단순한 반복적인 구조를 지닌다. 흔히 '토톨로지'(동어반복, tautology)의 구조라고 칭하는 이들의 조각은 토톨로지가 지닌 또 다른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은 '토톨로지'를 동어반복이라는 의미보다는 '항진명제'라는 논리학적 수학적 의미로 사용한다. 가령 '사람은 죽거나 죽지 않는다'라는 문장은 예외적인 사항을 허용하지 않으므로 항상 진리인 명제이다. 이 명제는 현실과 상관없이 인간의 논리적 사고에 의해서 그렇게 정해진 법칙이다.

'2는 1보다 크다'라는 명제는 증명을 통해서 확인될 수 있지만, '2는 1보다 크거나 크지 않다'는 명제는 아무런 증명이 필요 없이 그 자체로서 이미 진리인 명제이다.

미니멀리즘 작가들이 토톨로지의 구조에 집착하는 것은 그저 단순성을 추구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자명한 어떤 구조를 발견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 자명한 구조는 작가의 어떠한 자의성도 배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니멀리즘의 예술에 매우 적합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작품은 그 자체로서는 의미가 배제된 어떤 중립적인 데이터만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수식과도 같은 이러한 데이터 자체로부터는 어떠한 의미도 발생하지 않는다.

앙드레나 저드는 작품 자체가 이미 고정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에 대해서 매우 반발하였다. 의미는 오로지 관객의 주관적 체험을 통해서 발생하는 것이며, 그것은 복합적이고도 가변적인 상황이 만들어내는 산물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생각 자체가 미니멀리즘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가장 기본적인 수식구조(토톨로지)로부터 복잡한 의미구조를 연역해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모순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모나 하툼(Mona Hatoum)의 작품 '저 끝 편의 불빛'(The Light at the End, 1989)은 토톨로지의 수식구조 자체가 이미 중립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매우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녀의 작품은 마치 감옥을 연상시키는 붉은 벽돌 벽면의 한 모퉁이에 매우 단순한 토톨로지의 구조물을 설치하여 그곳에 집중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다.

설치된 작품은 저드나 앙드레의 작품을 연상시키지만 그 자체가 감옥의 철장과도 같은 구속과 절망의 감정을 유발한다. 중립적인 토톨로지 구조에 대한 환상을 비틀고 있는 것이다.

언어가 세상의 그림이라는 의 발상이 갖는 문제도 흡사하다. 세상에 대한 그림은 중립적인 수학적 언어로 그릴 수 없다. 말하자면 그림과 수학적 기호는 다르다.

분명히 탁자 위에 사과가 놓여있는 사태를 '탁자 위에 사과가 있다'는 원자명제로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은 단지 '탁자 위에 사과가 있다'는 서술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탁자 위에 사과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불안하게 놓여있을 수도 있으며, 반대로 탁자 위에 마치 하나의 단단히 붙어있는 것처럼 안정된 모습으로 놓여있을 수도 있다.

또는 탁자의 탁한 색과 사과의 반질거리는 표면의 대비가 묘한 긴장감과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을 수도 있다. 이것은 명제로 나타낼 수 없다. 따라서 '탁자 위에 사과가 있다'는 것은 현실의 다양한 양상들을 제거해 놓은 추상적인 언명에 불과하다. 그것은 사실상 어떠한 그림도 아니다.

그것은 디지털 언어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어느 디지털 언어에 의해서 표상된 이미지가 현실에 대한 명확한 그림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정확하게 의 오류로 다시 회귀한다.

디지털 이미지는 명백히 수학적 기호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알고 보면 컴퓨터의 무수히 많은 명령어들, 즉 명제들로 이루어져 있다. 만약 디지털 부호로 이루어진 그림이 현실의 세계와 동등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이 그러했던 것처럼 둘은 동등한 논리적 구조를 가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세계는 어떤 불변의 요소들로 환원될 수도 없으며, 원자명제로 환원될 수도 없다. 디지털 언어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계는 단지 추상화된 세계일뿐이다. 디지털 언어는 결코 세계 자체를 표상할 수는 없다.



박영욱 숙명여대 교양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