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그리기 40년… 전면에 들꽃, 산과 물, 운무 가연의 기억 담아내

'기억 속으로(in to the memory)' 162×97.0cm 캔버스에 유채 2010
개막일을 하루 앞둔 1월 27일 오후, 마지막으로 그린 백두산과 야생화 작품은 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채 전시장으로 왔다.

새벽까지 작업을 했다는 는 작품이 온전하게 걸리자 비로소 안도했다. 1년 2개월여를 세상과 등지고 매일 엄청난 시간을 작업에 쏟아온 김 작가는 마무리까지 손수 챙겼다.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전시에서 김 작가는 신작들로 또 다른 세계를 열었다. 그만의 독특한 화풍은 여전한데 변화가 두드러진다. 중심인 들꽃에 산과 물(강), 운무 등이 어우러져 있다.

는 40여 년을 꽃만 그려온 '꽃의 화가'다. 그것도 화단에서는 유일하게 야생화라는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한 화가다. 그런데 신작들은 전면에 들꽃을 배치하고 중경에는 야산을, 그리고 원경에는 운무에 쌓인 원산을 배치한 3단 구도 형태다.

그래서일까, 들꽃의 아우라와 느낌이 이전과 다르다. 김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인 들꽃의 꼿꼿함은 그대로인데 산과 물, 운무와 혼융되면서 온화해지고 자연과 가까워졌다.

'기억 속으로(in to the memory)' 162.2×97.0cm 캔버스에 유채 2010
작품의 소재들은 저마다 강한 개성을 지녔음에도 조화를 이뤄 또 다른 개성을 품어낸다. 작가의 '기억'이라는 본류에서 발원하는데다 작가 특유의 예술적 버무림에 기인한 것이리라.

김 작가는 젊은 시절 수많은 산을 올랐다. 북한산, 설악산, 무등산, 백두산까지. 그리고 산행에서 자연이 전하는 경이로움과 감동을 기억에 담았다. 특히 인적 드문, 후미진 곳에 핀 야생화는 큰 울림으로 다가와 그의 심안을 지배했다.

"외로이 산속에 홀로 피어 있는 야생화의 몸짓에서 영혼을 느꼈어요. 그 꿋꿋하고 당당함이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사계절 눈보라와 세찬 바람을 이겨낸, 마치 서정주 시인의 '국화' 를 연상시키는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번 신작에서도 들꽃은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중추 역할을 한다. 꽃은 산과 물을 만나 생동감이 배가되고, 산과 물은 꽃을 감싸 안아 편안하게 자연의 일부로 환치시킨다.

이 기억 속의 자연은 육안에 의해 포착된 풍경의 재현이 아니라, 작가의 사유에 의해 변환된 또 다른 상징이다.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 감흥을 내면화해 표상한 작품은 자연 너머의 인생을 관조하게 한다.

김희재 작가
"사람들은 시들어 가는 꽃을 절망으로 느끼지만 오히려 종자인 씨를 안고 있어요. 죽음이라는 것, 시든다는 것이 꼭 절망적이지만은 않아요. 그게 더 큰 환희이고, 희망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생도 마찬가지지요."

신작에서 세월의 두께를 실감시키는 산의 무게와 흘러가는 삶을 연상시키는 물은 꽃과 더불어 자연의 심연과 맞닿은 인생을 돌아보게 한다. 또한 갈색조의 모노크롬 화면과 동양화풍의 허공은 그러한 사유에 깊이를 더한다

붓이 아닌 나이프를 사용하는 작가의 작업 방식도 작품의 가치를 높이는 데 한몫 한다. 일반적인 화필의 기교를 배제하고 본질과 대면하고자 하는 작가의 조형의지가 관객들을 작품 너머의 정신적인 것으로 이끈다.

수필가 피천득 선생은 2004년 KIAF(한국국제아트페어) 전시장을 돌아본 후 "최고의 작가는 김희재"라고 평한 바 있다. 김 작가의 작품에 담긴 '인생의 깊이'를 칭찬한 것이다.

대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자연에 대한 관조와 이상을 추구하는 의 전시는 각박한 현실에서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안식의 공간을 제공할 것이다. 전시는 2월 14일까지. 02-736-1020

인터뷰

이전의 들꽃 작품들에 비해 신작에는 산이 두드러지는데 변화의 의미는.

"저의 작품은 대자연에서 받은 감동을 화폭에 담은 것인데, 산을 소재로 한 작업은 대학시절 박고석(1917∼2002) 선생님과 산행을 하면서 당시에 느꼈던 경이로움과 감동을 화폭에 담기 시작한 때부터예요. 이번 신작의 산과 물은 들꽃처럼 오랫동안 간직한 기억들을 풀어낸 겁니다. 꽃 혼자 함의하던 것들을 산과 물로 편하게 놓아주고 자연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간 것이죠."

작품에는 항상 들꽃이 등장합니다. 야생화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산행할 때마다 꽃을 만났는데, 특히 야생화는 가녀리지만 강한 생명력을 지녔어요. 누가 주목하지 않아도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게 안쓰러우면서도 경이로웠어요. 사람의 인생도 외면받거나 굴곡이 있게 마련인데 야생화처럼 줏대 있고 당당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다고 봐요.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면서도 제 몫의 역할을 다하는 야생화는 꽃 이상의 의미도 전합니다.

전시가 <기억속으로>의 연작인데, 작품에서 '기억'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요.

"<기억속으로> 시리즈 작업을 하는 이유는 지금 이 시간이 지나면 기억만이 남고 과거가 되잖아요. 기억이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삶이란 기억들의 연속이며, 기억들이 끝나면 생도 마지막인 것처럼 저는 저의 작품에 감동들을 기억으로 펼쳐 놓고자 해요. 아름다움, 슬픔, 아픔, 그리움, 환희 등에 대한 격정을 저의 작품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감동으로 느껴지길 바라면서 작업에 임합니다.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