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和: 일본 현대 디자인과 조화의 정신' 전]

당신이 도쿄에 사는 음악가라고 상상해 보자. 기타는 당신의 동반자고 피아노는 당신의 룸메이트다. 하지만 도쿄의 미어터지는 주거 환경은 당신의 가족관계에 너그럽지 않다.

월셋방을 얻을래도 집주인이 난색이다. 음악가라면 으레 소란하여 이웃을 방해할 것이라 생각하니 말이다. 직업을 묻는 말에 당신은 그만 구차하게도 "하..학생"이라고 대답하고 만다.

여차저차 집을 마련해도 문제다. 피아노와 동거하기에는 너무 좁은 방이다. 궁여지책으로 피아노 아래 이불을 펴고 잠을 청하다간 폐쇄 공포증에 깔려 죽을지도 모른다. 곤경에 처한 당신을 위해 디자인이 나섰다. 일본의 악기 브랜드인 야마하는 볼륨을 고요히 낮출 수 있는 '사일런트 기타'와 슬림한 몸매로 벽에 착 붙는 피아노 '모더스 F11'을 내놓았다.

이들과 함께라면 당신은 집주인에게 들키지 않고, 이웃을 방해하지 않고, 좁은 공간과 씨름하지 않고도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다. 그리고 얼마든지 학생 신분을 유지할 수 있다.

이는 일본 디자인의 저력이 조화의 정신에 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다. 일본의 현대 디자인은 전통과 최첨단 기술,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 일본적인 것과 이국적인 것, 감성과 이성 등 다양한 요소간 조화를 바탕으로 한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환경 간 조화를 이끌어내는 아량도 여기에서 나온다.

모더스 F11(좌), 사일런트 기타(우)
'和'를 주제로 일본 디자인을 조명해보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한국국제교류재단과 일본국제교류기금,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이 공동주최하는 <和: 일본 현대 디자인과 조화의 정신> 전이다. 일본의 일상에서 쓰이는 약 2만 점의 제품 중 조화의 정신이 담긴 161점의 사례가 소개된다.

'귀여운', '공예적인', '결이 고운', '감촉이 있는', '미니멀한', '사려 깊은' 등 6개의 키워드로 일본 디자인의 특성을 분석하고, 주방용품과 욕실용품, 디지털 기술, 포장과 가방, 교통수단 등 12개 기능에 따라 제품을 분류했다. 야나기 소리, 후카사와 나오토, 미야케 잇세, 야마모토 요시히로 등 일본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들의 제품도 직접 볼 수 있다.

3월19일까지 이어지는 전시 기간 중 토요일마다 열리는 특별강연 시리즈는 일본과 한국의 디자인을 비교, 이해하는 데 유익한 기회다. 일본 디자인의 현주소를 소개하는 강연은 물론, 일본 디자이너와 한국 디자이너가 직접 제품 기획과 생산 과정을 들려주는 강연, 양국 디자인의 차별성과 영향관계에 대한 강연도 마련되어 있다.

전시는 서울 중구 순화동에 위치한 한국국제교류재단 문화센터에서 열린다. 02-2151-6500 www.kf.or.kr


잘 익은 벼는 자연의 축복이다. 밥상에 올라 배를 불리고 술통에 들어가 흥을 더한다. 여기 이 넉넉한 인상의 술통은 한번 벼를 품으면 잔치마다 아낌 없이 술을 내어줄 것 같다. 전통을 따라 나무로 만든 통에 회사 이름 후쿠니시키의 첫 글자의 히라가나를 모티프로 한 그래픽을 입혔다. 잘 들여다보면 그게 벼로 보이기도 한다. 당신이 취해서만은 아니다.

후쿠니시키 술통(1993)
시라키 쓰쿠시 도시락(2003)
'벤또'는 위대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인의 성실 근면의 배경에는 든든한 집밥을 간편히 휴대할 수 있는 이 도시락통이 있었다. 일본 아키타 지방에서 자생하는 삼나무를 얇게 잘라 구부려 만든 이 둥근 도시락통은 아직도 일본인의 점심을 책임진다. 두 개의 도시락통이 한 세트고, 하나가 다른 하나 속에 쏙 들어간다.


일본엔 신(神)이 많다. 일본인들은 만물에 영이 깃들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무나 돌은 물론 찬장과 문지방도 그들에겐 범상한 데가 아니다. 그래서 일본의 가정에는 흔히 제단이 있었다.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신을 느끼고 복을 빌고 마음을 낮추는 의식이 후대에 이어지길 바랐던 우치다 시게루 디자이너는 현대적 주거 공간에도 잘 어울리는 제단을 만들어냈다.


이 코트들이 벼로 만들어졌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볏짚을 원료로 개발한 신소재로 재단된 코트들이다. 그만큼 가볍디 가볍다. 서로 연결할 수 있으니 옷 외에 다른 용도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벼가 주식을 넘어 주의의 자리까지 노린다.


이 니트를 입기 위해서는 잘라내야 한다. 무슨 소린가. 잘라내면 못 쓰게 되는 대부분의 니트와는 달리 이 니트는 구분선을 따라 잘라내지 않으면 입을 수 없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소매 기장을 조절하거나 목선의 모양을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일종의 반(半)DIY 제품인 셈이다. 패션의 완성, 화룡정점을 소비자의 손에 맡김으로써 디자이너들은 이 옷의 생산 과정에 소비자를 참여시켰다.

조립식 코트 '벼'(2008)

시리키 쓰쿠시도시락(2003)
디자인 즈시(2002)
A-POC 코튼 바게트(2000)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