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취업 리얼리티 프로그램패션지 에디터, 아나운서 선발 과정 등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관심 끌기

한 케이블 TV 채널에서 방영된 취업 리얼리티 프로그램 '디 에디터스'
케이블 TV 채널에서 처음 '취업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봤을 때 입맛이 썼다. 패션지 에디터 직을 놓고 6명의 인턴이 경쟁하는 내용이었는데, 그녀들의 모습에 막 취업시장에 뛰어든 동생들의 모습이 겹쳤기 때문이다. 카메라 앞 그녀들처럼 동생들도 늘 예쁘고 씩씩하고 찬란했지만 동시에 깊이, 힘들어했다.

'스펙'에 대한 부담, 경쟁에 대한 긴장, 한숨이라도 맘 편히 쉬면 뒤처질 것처럼 여기는 불안이 느껴져서 동생들이 면접에 떨어진 날에는 내가 다 외로웠다. 그런데 그걸, 취업 시장에서 자신을 처음 팔아보는 이들의 시행착오와 남루함을 홀로 다스릴 틈도 주지 않고 만천하에 공개하는 프로그램이라니.

케이블 TV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최근 한 지상파 방송사가 자사 신입 아나운서 선발 과정을 방송하겠다고 밝혔다. 논란이 되고 있지만, 시청률은 결코 낮지 않을 것이다. 훈남훈녀 아나운서 지망생들이 저마다 부담과 긴장, 불안과 싸우는 모습은 그 자체로 흥미진진한 예능 소재다.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이 으레 그렇듯 성장과 성공의 서사는 대리만족의 경험을 약속할 것이다. 프로그램이 시작되면 우리는 <슈퍼스타 K> 때처럼 '대국민 투표'의 기회를 기다리며 매회 TV 앞에 모여들지 모른다.

어쩌다 젊은이들의 취업 스트레스가 온 국민의 대중문화가 됐을까.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취업 과정은 필사적이기에 곧 드라마다. 대학생들이 자기소개서를 '자기소설서'라고 부른다는, <이것은 왜 또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의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영화 '이그잼'
"학벌과 학점과 영어 시험에서 시작된 취업 스펙 3종 세트는 자격증과 해외연수, 외모 관리와 성형이 포함된 7종 세트로 발전"했고 취업지망생은 책 읽기와 전공 공부, 여행과 학점 관리를 동시에 해내는 것을 넘어 원칙과 유연성, 냉혈한의 목표지향성과 원만한 대인관계를 두루 갖추어야 한다. 정말이지 '세상에 이런 일이'다.

그러니 취업사이트의 취업 수기를 클릭하고 취업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챙겨보는 건 결코 현실의 연장이 아니다. 그 편집된 성장과 성공의 서사들은 막막한 현실을 정당화하는 공공의 꿈이다.

속으론 러시아 불곰과 1대1로 맞붙은 것처럼 무서워도 겉으로는 당당하고 태연하게 '미션'을 수행하는 취업지망생들은 이 시대의 슈퍼 히어로고, 어떤 굴욕에도 굴하지 않고 인사 담당자의 매 같은 눈을 향해 입꼬리를 치켜 올리는 그들의 품성은 초능력이다. 하지만 이 꿈을 꾸는 동안은 아무도 현실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묻지 않는다.

한 세계적 인터넷 기업의 입사 시험을 모티프로 한 영화 <이그잼>에서 취업 과정의 혹독함은 스릴러 장르의 요소로 쓰인다. 8명의 지원자가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밀실에 모인다는 설정 하나로 숨을 틀어막는다.

감독관은 세 가지 규칙만을 일러주고 나가 버리는데 정작 시험지에는 아무 문제도 적혀 있지 않다. 지원자들은 혼란에 빠지고 제각각 암중모색을 시작한다. 이 간소한 전개가 관객을 몰입시키는 데 감독관의 한 마디가 결정적이다.

"이 80분이 당신의 80년을 좌우합니다." 지금 취업지망생들도, 그들의 고군분투가 남의 일 같지 않지만 애써 강 건너 불구경하고 싶은 대중도 정말이지 그런 심정으로 산다.

설 연휴 기간의 사건사고 중 가장 씁쓸했던 건 19살 청년이 저지른 연쇄방화였다. 대학을 중퇴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그는 취업도 안 되고 앞으로 뭘 할까 싶은 마음에 불을 질렀다고 했다. 대수롭지 않은 이유다. 그런데 저런 마음이 대수롭지 않아진 현실은 대수롭다. 젊은이들의 인생이 스릴러가 됐으며, 슈퍼 히어로의 다른 얼굴이 범죄자란 점을 취업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결코 말하지 않는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