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봉선 전20여 년간 화첩에 담아온 매화 다양한 기법으로 표현

문봉선 작가. 매화, 147×475cm 천수묵채색 2011/사진=임재범 기자
어김없이 봄은 오고, 꽃은 핀다. 꽃들은 한겨울의 잔영이 가신 뒤, 따뜻한 봄기운이 완연한 때에 모습을 드러낸다. 봄이 왔음에도 봄 같지 않은 초입에 꽃을 보기란 쉽지 않다.

매화만이 온전히 봄을 열고, 봄을 맞는다. 매화는 긴 겨울의 혹한을 견디고 잔설 속에서 가장 먼저 꽃망울을 터트려 그윽한 향기를 전한다. 그 자태와 품격은 선조들에게 세상의 부침에 연연하지 않는 덕을 가르쳤고, 오늘날에도 강한 생명력과 역경을 이겨내는 의지의 표상으로 위안을 준다. 예나 지금이나 봄 언저리인 이맘 때 사람들이 매화를 찾고, 흠모하며, 기다리는 이유다.

화랑계에도 봄을 알리는 첫 전시로 매화전이 풍성하다. 그중 문봉선 작가(홍익대 교수)의 매화전에는 특별한 향이 있다. 흔히 매화도에서 떠오르는 건조한 관념의 향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매화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이다.

이는 문 작가의 매화 그림이 단순히 손재주가 아닌, 칼바람을 맞으며 발로 담아내고 고고한 정신으로 품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20여 년간 이 산하 곳곳의 고매(古梅)와 명매(名梅)를 찾아 긴 시간을 보냈다. 1990년 봄날 순천 선암사의 홍매(紅梅) 사진에 매료돼 곧바로 달려간 이래 광양 매화농원, 김해농고와 지리산 단속사, 구례 화엄사 구층암 등 이름난 매화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화첩(畵帖)에 담았다.

매화, 천수묵채색 145×299cm, 2010
또한 중국 난징(南京)의 매화산, 일본의 오사카성 매원, 후쿠오카의 신사와 농원까지 샅샅이 훑고 다녔다. 도록에 실린 것만 70점을 헤아리고, 그간의 자취가 고스란히 담긴 화첩이 50권을 넘는다.

서울 인사동 공아트스페이스에서 '문매소식(問梅消息)'이라는 타이틀을 단 이번 전시에는 한국의 매화를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의 매화 작품 60여 점과 현장의 매화를 사생한 화첩이 선보인다.

소품에서 5미터 길이의 대작까지 60여 점의 매화는 얼추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꽃과 가지, 줄기 등이 각각 다르고 저마다의 개성이 뚜렷하다.

어스름한 기운의 달빛 아래 꿈틀거리는 모양의 매화는 긴 겨울을 잘 이겨내고 이제 곧 봄이 오리라는 것을 전하는 듯하고, 막 피어나기 전의 찰나의 모습을 한 매화에선 자연의 생기가 선연히 느껴진다. 오랜 풍화를 이겨내 시간을 흠뻑 머금은 듯한 매화의 웅장함, 눈(雪)의 차가운 기운을 뚫고 나오는 홍매화의 당당함, 도자 위에 피어난 어린 매화의 운치 등, 형(形)은 다채롭고, 마음(心)은 깊어진다.

그가 현장을 사생하고 펴낸 사군자 다시 보기 <새로 그린 매란국죽>(2006)은 그의 묵매화(墨梅花)가 얼마나 개성적이고, 차별화된 감동을 주는지를 엿보게 한다.

매화, 지본수묵채색 235×53cm, 2010
"매화 가지는 본 줄기에서 먼저 세 가지가 나오는데, 줄기와 방향이 같은 가운데 가지가 다른 두 가지보다 길게 자란다. 다시 1년 동안 그 세 가지가 줄기가 되고, 다시 세 가지가 옆으로 작은 햇가지를 만들어 나무의 형태를 만든다. 해가 가면서 세 가지 중 한두 가지는 퇴화하여 말라죽고 그 옆에 무수한 햇가지가 나오는 것이 매화의 특성이다."

이는 오랫동안 매화를 연구하고, 부지런한 발걸음으로 매화와 대화를 한 이만이 할 수 있는 얘기다. 그의 매화도를 마주하면 마치 현장에서 실경의 매화를 감상하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되는 배경이다.

여기에 평단이 인정하는 독창적인 작품성은 매화도의 본질에 더욱 다가가게 한다. 매화도의 전범으로 삼는 범성대(중국 남송, 1126~1193)의 <매보(梅譜)>에서 "묵매화는 노매에서 느끼는 오랜 세월 속에 풍상을 겪은 듯이(체고 體高), 늙고 오래된 줄기가 뒤틀려 기괴한 모습으로(간괴 幹怪), 가지가 곧고 맑아야 하고(지청 枝淸), 어린 햇가지에 힘이 있어야 하며(초건 梢健), 드문드문 피어있게(화기 花奇) 그려야 한다"고 했다.

문 작가의 매화도는 그러한 매화에 충실하다. 이는 그의 매화 그림이 생태에 대한 이해의 바탕 위에 인문학적 의미 부여가 결합된 지점에서 예술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그는 최근 한지 위에 먹으로 풀어내는 수묵화의 정석에서 나아가 또 다른 방법론으로 매화를 피워내고 있다. 흔치 않은 소재인 캔버스 천과 광목을 사용하고, 아크릴 물감을 이용해 붓이 아닌 손으로 꽃잎을 표현하기도 했다.

매화, 지본수묵 45×35cm, 2009
"창신(創新) 없는 법고(法古)는 회고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당대인과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미감으로 현대적인 운치를 창조한다는 시도를 해 본 것입니다."

그는 매화의 가장 본질적인 미덕을 '기다림'이라고 말한다. 엄혹한 겨울을 견뎌내고 피는 매화는 단순한 꽃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 다가온다.

문봉선 작가의 붓끝에서 살아난 매화의 풍미와 다양한 매화의 모습을 관람할 수 있는 전시는 27일까지 열린다. 02-730-1144


매화, 지본수묵채색 95×62cm, 2002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