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극작가가 쓴 일본군 위안부 다룬 연극… 감정보다 객관적 묘사

남자들은 히죽히죽 웃고 여자는 울부짖는다. 막사 안에서 들리는 괴성은 즐거움과 괴로움이 뒤섞여 기괴한 느낌을 자아낸다. 하지만 막사 밖에 줄지어 서 있는 남자들은 아무래도 상관 없다. 곧 돌아올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막사에 비춰지는 그림자들에 자신을 대입시킨다.

"특급호텔에 온 걸 환영한다!" 한 일본군이 '특급호텔'로 불리는 막사 앞에서 소리를 지르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연극은 위안부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특급호텔>이다. 실제로 연극에는 저와 같은 구체적인 상황이 나오지는 않지만, 막사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은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삼일절을 앞두고 2월 25일부터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되는 <특급호텔>은 미국 극작가 라본느 뮐러가 일본에 체류하던 중 우연히 위안부에 관한 이야기를 접한 뒤 쓴 작품으로, 제목인 '특급호텔'은 당시 위안부 막사의 이름에서 따왔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외국인의 관점에서 집필된 우리의 아픈 역사 이야기라는 점. 뮐러는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등장인물들의 아픔을 시적 언어로 승화시키면서 작품의 예술적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연극은 실제로는 지옥과도 같았을 그곳을 역설적으로 '특급호텔'로 부르며 위안부들이 겪었을 고통을 객관적으로 담아내려 애쓴다. 이 작품은 '일본 군대에 유린되고 성의 노예가 된 네 여인의 삶을 호소력 있게 그려냈다'는 평을 받으며 2001년 국제평화상과 반전연극상을 수상하는 등 국제사회에도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특급호텔'에 거주하는 네 여인의 삶은 처참하다. 전쟁의 광풍에 휘말려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끌려온 소녀들은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티며 살아가고 있다. 끌려오던 날부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토해내던 이들은 결국 잔혹한 현실과 맞닥뜨리게 된다.

위안소를 탈출하다 붙잡혀 다리가 잘리고, 처참하게 고문을 당한다. 힘든 현실을 이기지 못한 소녀는 자살을 택하기도 한다. 지옥 같은 특급호텔의 삶은 일본의 패전으로 끝나지만, 그들의 고통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위안부 문제로 고통받고 있는 피해자들이 살아가는 곳에서의 공연이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이 작품이 지난 2008년 서울연극제를 통해 한국에서 처음으로 정식 공연됐다는 점이다. 당시 미국에서도 워크숍 형태로만 두 차례 시연됐기 때문에 작품 속 사건이 현재진행형인 나라에서 공연된다는 점은 상징하는 바가 컸다.

극단 초인에 의해 초연된 이 작품은 그간 발표된 위안부 소재의 작품들과 시각의 차이가 있다. 대개의 작품들이 위안부 문제를 감성적인 시각으로 풀어내려 했다면, <특급호텔>은 시적인 대사와 객관적 거리두기를 통해 보다 차가운 접근법을 적용했다.

이는 감정적인 공감을 얻어내기보다는 작품 자체의 미학적인 완성도를 높이면서 위안부 문제의 심각성을 납득시키면서 국민적인 관심을 유도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연출을 맡은 극단 초인의 박정의 대표는 "위안부 문제라는 역사적 사건을 다루면서 주관적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한 편의 예술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보다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묘사에 무게를 두려고 애썼다"고 설명하며 "그런 객관적 거리감과 미학적 완성도는 순간적인 감정의 회포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 더욱 진지한 고민으로 관객들을 이끌어줄 것이라 믿는다"고 연출의도를 밝혔다.

이 같은 차별화된 의도와 연출을 통해 작품성을 인정받은 <특급호텔>은 2009년 국내 재공연 후 부에노스아이레스 국제연극페스티벌(FIBA: Festival Internacionl de Teatro de Buenos Aires) 초청 공연을 두루 거치며 해마다 작품의 완성도를 점차 높여왔다.

지난해에는 2nd 대학로 우수작품 인큐베이팅 지원작으로 선정돼 올해 다시 남산예술센터의 공연이 확정됐다. 이처럼 국내외에서 지속적으로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는 점은 <특급호텔>의 공인된 작품성을 뒷받침해준다.

위안부 문제가 세계적인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작가인 뮐러가 기대했던 대로 '연극의 힘'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초연 당시 내한했던 뮐러는 "홀로코스트의 실상이 잘 알려진 것은 뉴스나 통계자료가 아니라 안네 프랑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연극이었다"고 말하며 "이 공연이 일본군 위안부의 실체를 더 알리고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으면 한다"고 개인적인 바람을 내비친 바 있다. 이제 연극을 통해 아시아의 사회적 이슈는 전 세계인이 공감하고 관심을 갖는 사안이 되고 있다.

박정의 연출가는 "중요한 것은 인간이다"라고 강조하며 "이 작품 역시 숭고한 인간성의 승리로 그려질 것이다. 그들은 그저 군수품으로 취급되었지만, 이제 그들은 그날을 증언하는 당당한 증인이 되어 우리 앞에 설 것이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올해 들어서 별세한 위안부 피해자는 지난 1월 초의 이기선ㆍ정윤홍 할머니를 필두로 임정자ㆍ김선이 할머니, 이번달의 박분이 할머니까지 벌써 다섯 명이다

최근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잇따른 별세로 현재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 생존자 수는 75명으로 줄었다. 역사의 증인들이 시나브로 사라져가는 지금, 무대 위 연극만이 쓸쓸히 지난날의 고통과 아픔을 시대에 고하고 있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