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in the Kitchen (15) 차홍차ㆍ녹차 마시는 풍경에 국민성도 드러나

'도대체 이 많은 사람들은 어디서 만났을까?'

점심시간 카페 앞에 줄 선 풍경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스타벅스로 대표되는 프랜차이즈 카페가 거리를 점령하기 전에 이 많은 사람들은 어디서 만나 뭘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던 걸까?

지금처럼 프랜차이즈 카페가 바글거리기 전의 일이다. 필자는 집 근처 한적한 카페 하나를 아지트로 찜해서 일하곤 했다. 동네 카페치고 커피 값이 비싼 데다, 골목 끝에 있어 낮에는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았다. 단점은 커피가 맛 없다는 사실인데, 그 때문에 사람들은 더 그곳을 찾지 않았다.

손님이 없는 그곳은 당연히 조용했고, 소파는 항상 새 것 같았고, 점원은 친절했다. 커피 맛 빼곤 모든 게 완벽한 카페였다. 그 카페는 필자 같은 단골만으로 '가늘고 길게' 명맥을 유지했다. 이처럼 카페의 성공 여부는 맛과 가격보다 입점 위치와 분위기에 달렸다. 요컨대 커피는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마시느냐가 중요하다. 너무 당연한 말이니 2절은 패스.

커피와 함께 세계를 양분하는 음료로 차를 꼽는다. 차 맛도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마시느냐가 좌우한다. 하지만 차와 커피는 시음 패턴에 차이가 있다. 커피는 일의 능률을 올릴 때 마시는 반면, 차는 일을 멈추고 한숨 돌리고 싶을 때 마신다. 그래서 홍차 마시는 시간을 'Tea Time'이라고 하고, 커피 마시는 시간은 'Coffee Break'라고 한다. 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어떤 시간을 만드는 구실이다. 본질보다 상황이 중요한 것은 실상 커피보다 차인 셈이다.

에밀졸라의 나는, 푸르스트의 나는

확대해석인 것 같지만, 차 마시는 풍경을 보면 그 나라 국민성을 알 수 있다. <프랑스 혁명사>란 대작을 쓴 역사가 쥘 미슐레는 유럽 세 나라의 특징을 이렇게 요약했다.

"영국은 제국이고, 독일은 민족이며, 프랑스는 개인이다."

이 말은 한 세기 이상 지난 오늘날에도 적용된다. 미슐레의 조국 프랑스는 다분히 개인의 나라다. 흔히 프랑스인들은 자기네 국민들이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 걸 강조하려는 듯 "프랑스는 6400만으로 나누어져 있다"란 말을 자주 쓴다. 6400만은 프랑스 인구 숫자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당연히 '나'다.

그래서 항상 나를 앞세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데카르트의 말은 프랑스의 개인주의를 집약하고 있다. 프랑스 소설가 에밀 졸라는 기실 소설보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더 유명해졌는데, 그 경우도 마찬가지다. 보불전쟁 때 간첩 누명을 뒤집어썼던 유태인 대위 드레퓌스를 구명하게 위해 에밀 졸라가 썼던 글의 첫 문장은 "드레퓌스는 억울하다!"가 아니라 "나는 고발한다!"였다.

그런데 '코기토 에르고 슘'과 차 마시는 풍경이 무슨 상관일까?

마르셀 푸르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홍차에 적신 마들렌' 이야기는 한번쯤 들어 보았을 게다. 몇 년 전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섹시 쿠키'로 소개되면서 홍차 적신 마들렌은 프랑스 디저트의 대명사가 됐다. 주인공인 '나'는 어느 날 홍차에 적신 마들렌 한 조각을 먹으면서 과거를 회상한다. 그가 탐색하는 대상은 바로 나 자신이다. 프랑스인들은 차를 마실 때도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나는 또 한 모금을 마셨다. 하지만 처음 마실 때 그 이상의 느낌이 들지 않았다. 세 번째 입에 댈 때는 두 번째보다 그 기분이 덜했다. 이제 멈춰야 할 시간이다. 차는 그 마법을 잃고 있다. 내가 추구하는 진실은 찻잔에 있지 않고 나 자신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 취향이 어디 가나

홍차가 유럽의 차 문화를 대표하는 음료라면, 녹차는 동양의 차 문화를 대표하는 음료다. 무엇이든 매뉴얼 만들기 좋아하는 일본인들은 차도 법도에 맞춰 마시는 걸 즐기는데, 차 마시는 풍경에서 그 예의 일본성을 발견할 수 있다.

미국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그 속에서 형성되는 타인지향적 삶을 '동물적 삶'이라 정의했던 코제브는 1956년 일본을 방문한 후 미국과는 또 다른 삶의 유형을 목격한다. 그것은 유럽 혹은 역사적 의미의 종교, 도덕, 정치가 없는 순수한 상태의 속물주의다. 속물에게는 자신의 모든 것이 오직 전시의 대상이다. 가령 차를 마실 때 중요한 것은 자신이 느끼는 고유한 풍미가 아니라 차의 평판과 자세, 차를 마신 후 내뱉는 감탄사, 즉 다도(茶道)다.

일본인 특유의 속물주의를 차 마시는 풍경에서 찾을 수 있을까? 홍차 하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생각나듯, 녹차 하면 떠오르는 소설이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다. 탐미주의 소설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이 작품에서, 녹차 마시는 장면은 그 정점으로 꼽힌다.

'예법대로 묽은 차를 권하고 나서,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사내가 무엇인가 말했다. 사내는 좀처럼 차를 마시지 않았다. (…) 믿기지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은 그 다음이었다. 여자는 자세를 바로 한 채, 갑자기 옷깃을 풀었다. 하얀 가슴이 드러났다. 여자는 하얗고 풍만한 젖가슴의 한 쪽을, 그대로 자기 손으로 꺼냈다. (…) 짙은 색 찻잔 속에서 거품을 띄우고 있는 연둣빛 차에, 희고 따뜻한 젖이 뿜어나와, 방울을 남기며 잔 속에 담기는 모양, 고요한 차의 표면이 하얀 젖으로 흐려져 거품을 일으키는 모양을, 바로 눈앞에 보듯이 역력히 느꼈다.'

이 대목은 주인공 미조구치가 전쟁 중 싸움터로 나가는 사관과 사관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의 이별을 훔쳐본 걸 회상하는 장면이다. 이 묘사가 아름답다는 일각의 평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이 소설이 일본 특유의 탐미주의를 보여준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알려져 있다시피 이 소설은 절대적인 미를 추구하다가 좌절한 사미승이 금각사를 불태워 버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인공 미조구치나 저자 미시마 유키오는 일본 속물주의의 전형이다. 이 책의 저자 미시마 유키오는 사실 작품보다 할복으로 역사 속 인물이 됐다.

실존이 없는 속물에게 고통과 쾌락은 타인의 시선에 의해 매개된 것이다. 그러니 속물의 몸짓이 격조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인위적으로 조정된 것이다. 자기파괴의 정점인 자살도 속물에게는 자아가 비어있는 퍼포먼스(할복)에 불과한 것이다. 이건 필자 개인의 사변이 아니라 코제브의 견해이니 의견을 달리한다면 작고한 그에게 따져 묻기를. 그는 콕 짚어 이렇게 썼다.

'이러한 자살은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내용을 갖고 있는 역사적 가치에 기초하여 수행되는 투쟁 속에서 맞이하는 생명의 위기와는 무관한 것이다.' (알렉상드르 코제브 <헤겔독해입문>,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재인용)

코제브 식으로 뒤틀어 본다면, 미시마 유키오의 궁극적 관객은 천황으로 표상되는 일본 정신일 게다. 그가 할복할 때 외쳤던 말도 "천황 폐하 만세"가 아니었던가.

점심시간이 지나도 카페 안은 조용해질 기미가 없다. 돛대기 시장 같은 카페에서 티백 넣은 종이컵을 들고 밖으로 나온다. 푸르스트의 차, 미시마 유키오의 차라고 상상하며 한 모금씩 마셔본다. 그들이 우려낸 차 맛은 시간 속에서 그리움으로 변해 우리의 뼈와 살과 정서 아래, 태아처럼 잠든다.

차 한 잔 마시면서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우리 정서 속에 태아처럼 잠들어 있는 기억은 무엇일까?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