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프리즘] 비크로프트의 퍼포먼스기하학적으로 배치한 여성들 오랜시간 방치 진리의 실체 벗겨

시라노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의 주인공 는 자신의 못생긴 코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 록산느의 앞에 나서지 못한다.

그는 록산느를 사랑하는 자신의 경쟁자인 크리스티앙의 연애시를 대신 써주며 록산느에 대한 자신의 열망을 간접적으로 채우고자 한다. 너무나도 주옥같은 의 연애시는 록산느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지만, 정작 그녀는 그 아름다운 시를 만든 사람이 인지는 꿈에도 모른다.

가 쏟아내는 온갖 현란한 수식어와 비유, 아름다운 문장의 의미는 오로지 하나다. 그것은 록산느라는 여성이다. 가 쏟아내는 모든 말 속에 담긴 진리는 오로지 록산느라는 여성일 따름이다. 그녀는 가 쓰는 글의 진리이다.

록산느를 자신의 품에 넣지 못하는 한 는 끊임없이 시를 써야 하는 운명이었던 셈이다.

니체는 <선과 악을 넘어서>에서 선과 악의 이분법적 도식을 비웃는다. 선한 것은 진리이자 영원한 것이며, 악은 사멸해야 하는 것이라는 이 이분법이야말로 매우 천박한 생각이다. 선한 것과 악한 것의 이분법은 나약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허상에 불과하다. 진짜 도덕적인 것, 혹은 진리는 절대적으로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바네사 비크로프트, VB39
그것은 선하기도 하며 악하기도 한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선과 악을 넘어선 것이다. 니체에게 여성이란 바로 그러한 존재이다. 말하자면 여성이 곧 진리인 것이다. 말하자면 로 하여금 끊임없이 글쓰기를 재촉한, 아니 의 모든 글이 담고 있는 진리가 바로 여성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니체는 여성이 진리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성은 결코 정복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록산느 앞에 결코 나설 수 없는 의 경우처럼 진리는 결코 소유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소유하는 순간 그것은 어떠한 신비감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여성이라는 진리는 항상 위장된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마치 심오한 듯하지만 사실은 매우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흥미롭게도 진리인 여성 자신은 매우 표면적이고 피상적이기 때문에 진리에 관심조차도 없다. 여성은 진리이지만 정작 그러한 진리는 그 자체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비어있는 기호일 뿐이다.

말하자면 여성이 진리일 수 있는 것은 그러한 비어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여성은 항상 자신을 베일로 가린다. 여성에게 주어진 운명은 그 베일을 벗고 더 이상 진리가 아니게 되든지 혹은 베일이 벗겨지지 않도록 항상 일정한 거리를 취하고 달아나는 것이다.

'여성이 가지는 마력과 가장 무서운 효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산한다. 이 마력은 무엇보다도 거리 자체를 필요로 한다.' 그 이유는 여성의 진리성 자체가 아무런 실체도 없기 때문이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지 않게 되면 아무런 실체도 없다는 여성의 정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네사 비크로프트, VB46
여성은 진리이지만 그 진리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여성이라는 진리를 위해서 철학자인 남성은 엄청난 철학적 담론을 쏟아내지만 진리의 형이상학적 담론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니체는 말한다. 진리 안에는 진리가 없다. 오로지 무진리만이 진리일 따름이다. 무수히 많은 철학적인 사도들이 쏟아내는 무수히 많은 진리의 언어들은 결국은 비어있는 비진리를 향해서 쏟아낸 수사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아무런 소득 없는 의 독백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표면상 진리인 여성의 입장은 어떠할까? 자신이 진리가 되어서 많은 철학적 사도들의 담론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 혹은 여신이 되어서 남성으로부터 찬양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여성은 자신의 베일을 벗겨내는 순간 더 이상 여성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빈 모습을 은폐할 수밖에 없다. 오로지 은폐를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여성의 운명인 셈이다. 진리로 행세를 하기 위해서 그 실체를 드러낼 수 없고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것이 되어야만 하는 철학적 진리와도 같은 운명이다.

바네사 비크로프트(Vanessa Beecroft)는 여성에게 가려진 베일을 벗겨내고 여성의 비진리성을 폭로한다. 그녀의 퍼포먼스는 매우 선정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자신 이름의 이니셜을 따서 VB로 명명한 일련의 작품들 중 상당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성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작가가 부여한 최초의 형태에서 정자세로 몇 시간씩이나 유지하고 있다. 마치 마네킹을 전시한 듯하지만 모두 다 살아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신세계 백화점에서 퍼포먼스를 한 적이 있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실정이나 정서를 고려하여 속옷을 걸쳐야 했다.

비크로프트의 퍼포먼스에서 중요한 사실은 진리로서의 여성을 오랜 시간 방치함으로써 그 진리의 실체를 벗겨낸다는 것이다. 여성의 도발적이고도 에로틱한 몸이라는 진리가 매우 정돈된 형태로 획일적으로 전시됨으로써 사람들은 그 진리가 그저 도발적으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구성물임을 깨닫는다.

진리인 여성은 그러한 구성적 배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몇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는 힘든 노동을 감내해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힘든 노동이 된다. 진리이기 위해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과도 같다.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비크로프트의 퍼포먼스가 매우 미니멀리즘적인 형태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그녀는 여성들을 기하학적으로 배치시킨다. 이러한 기하학적 배치는 마치 미니멀리즘의 조각물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미술사적인 맥락에서 볼 때 저드나 앙드레의 기하학적인 배치는 백인 남성적 시각을 반영한 것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그들은 주관적이고도 관념적인 추상표현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실제 공간에 기하학적으로 단순한 조각물을 배치하였다. 어떠한 주관적인 의도도 배제된 이 기하학적인 조각물의 의미는 관객이 그 공간에 개입함으로써 비로소 극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단순한 기하학적인 형태는 사실상 지극히 수학적이며 논리적인 남성성을 전제한다.

비크로프트는 그러한 기하학적 구도에 여성의 몸을 배치함으로써 미니멀리즘의 남성중심적 담론을 승화한다. 이는 퍼포먼스 VB39에서 잘 드러난다. 이 퍼포먼스는 여성이 아닌 제복을 입은 진짜 해군 장병들을 기하학적으로 배치하고 있다.

이 기하학적인 배치는 미니멀리즘의 전형적인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 남성성을 적나라하게 표출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여성에게 이러한 제복의 기하학적 배치는 남성적인 성적 매력을 발산할 수도 있다. 이와 비교해 보면 벗은 여성의 기하학적 배치는 묘하게도 제복을 입은 남성의 기하학적 배치와 중첩된다.

비크로프트의 퍼포먼스는 매우 중첩적인 방식으로 남성중심성과 여성의 비진리성을 표출하고 있는 셈이다.



박영욱 숙명여대 교양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