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인 더 키친 (16) 봄나물겨울 견딘 풋것의 비린내, 혀 끝에서 느끼는 계절감

봄나물을 이용한 한식요리 - 프라자호텔 / 신상순 기자
어린 시절 동네 아줌마들을 따라 봄나물 캐러 간 적이 있다. 영문은 모르지만, 어쨌든 먼 데 놀러간다는 생각에 따라 나섰는데, 웬걸 허허 들판에 쪼그리고 앉아 쑥 몇 줄기를 뽑다가 하루 종일 엄마 뒤만 따라다녔다.

지루함보다는 추위를 견디기 어려웠다. 봄볕 무섭다며 단체로 뒤집어 쓴 수건이 무색하게 하루 종일 구름이 끼었고, 바람이 불었다. 그날 바람은 봄보다 겨울에 가까운 바람이었고, 장갑을 집에 두고 온 탓에 손끝은 아리도록 시렸다.

"왜 여기는 과자도 안 파냐?"며 언니와 쌍으로 울었는데, 이후 다시는 봄나물 캐러 가자고 말하지 않았던 걸로 보아 그때 엄마도 꽤 피곤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날 캔 쑥으로 쑥버무리를 만들었는데, 필자를 비롯해 평소 쑥이라면 밥상 근처도 안 갔던 아이들이 그 떡으로 쑥 맛을 알았으니, 그날 나들이 성과가 영 없었던 건 아니다.

혀끝에서 느끼는 계절감은 사실 음식의 맛이 아니라 음식에 얽힌 기억, 혹은 기억의 덩어리가 빚어낸 통념에서 비롯될 게다. 칼바람 부는 2월, 달래나 냉이를 씻으며 "벌써 봄"이라고 우기는 엄마를 볼 때마다 "그렇게 믿고 싶은 의지"라고 한 마디 하고 싶지만, "성질머리가 그러니 여태 시집도 못간 거"라고 되받지 않을까 싶어 입을 다물고 만다. 우리는 겨울 옷을 입고 봄나물을 먹으며 봄을 기다린다.

다시 겨울을 견디었다고 말했다

산채보리밥
'봄: 겨울과 여름 사이 계절로 1년을 4계절로 나눌 때 첫 번째 계절이다. 천문학적으로 춘분부터 하지까지가 봄이지만 기상학적으로 3,4,5월을 봄이라고 한다.'

봄을 사전에서 찾다 보니 "본래 그러한 것이 있고 마땅히 그러한 것이 있다"는 퇴계 이황의 말만 떠오른다. 봄에 관한 정의는 겨울과 여름에 기대어 생기는 것인데, 겨울은 봄과 가을에, 여름은 봄과 가을에 기대어 발생하니, 결국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봄나물도 본래 그러하듯이 저절로 돋아난다. 사람들이 하고 많은 음식 중에 봄나물을 먹으며 봄을 기다리는 건 이 풀들이 땅 속에서 겨울을 견뎌냈다고 믿기 때문일 게다. 부풀어 오른 흙 냄새, 싹터 오르는 풋것의 비린내는 애매모호한 봄을 단박에 정의 내린다.

봄이 되면 흙이 부풀어 오른다. 초봄의 햇살은 흙 표면의 얼음을 녹이고 땅 속으로 스민다. 땅 속 얼음이 녹은 자리마다 작은 구멍이 열리고, 이 구멍마다 물기가 흐른다. 봄풀은 이 물기를 타고 뻗어가고, 헐거워진 흙 속 미로를 따라 땅 위로 올라온다.

동세대 사람들도 성질이 제 각각이듯 같은 계절에 돋아난 봄나물의 성질도 제각각 다르다. 작가 김훈은 에세이 <자전거 여행>에서 봄나물의 특징을 감각적으로 서술한 바 있다.

미나리셀러리잡채
그는 '냉이의 뿌리에는 봄 땅의 부풀어 오르는 힘과 흙냄새를 빨아들이던 가는 실뿌리의 강인함이 살아 있다. 그 이파리에는 봄의 햇살과 더불어 놀던 어린 엽록소의 기쁨이 살아있다'고 적었다. 냉이된장국을 먹을 때, 몸 속으로 봄의 흙 냄새가 자욱이 퍼지고 혈관을 따라가면서 마음의 응달에도 봄 풀이 돋는 것 같다.

달래는 냉이와 한 짝을 이루면서도 냉이의 반대쪽에 있다. 똑같이 메마르고 거친 땅에서 태어났으나 냉이는 그 고난으로부터 평화의 덕성을 빨아들이고, 달래는 시련의 엑기스만을 모아서 독하고 뾰족한 창 끝을 만들어낸다. 그 작고 흰 구슬 안에 한 생애의 고난과 또 거기에 맞서던 힘을 영롱한 사리처럼 간직하는데, 그 맛은 너무 독해서 많이 먹을 수가 없다.

쑥은 언 땅을 뚫고 가장 먼저 이 세상에 엽록소를 내민다. 낯선 시간의 최전선을 이끄는 이것들은 여리고 애달프다. 된장 국물 속에서 끓여질 때, 쑥은 냉이보다 훨씬 많이 된장 쪽으로 끌려간다. 국물 속에서 쑥 건더기는 다만 몇 오라기의 앙상한 섬유질로만 남고, 쑥이 국물에게 바친 내용물은 거의 전부가 냄새다. 그 국물은 쓰고 또 아리다.

김훈이 발표한 글을 시간 순서대로 읽다 보면 에세이에서 보여준 사유가 소설에서 변형돼 다시 사용되는 걸 발견할 수 있는데, 2000년 보여준 이 1인칭의 세계는 2004년 3인칭의 세계로 건너가며 이렇게 바뀌었다.

'백성들은 냉이가 다시 겨울을 견디었다고 말했다. 냉이의 말이 아니라 사람의 말이었다. 뿌리가 깊어야 싹을 밀어 올린다, 봄은 지심(地心)에서 온다고, 냉이를 캐던 새남터 무당이 말했다. (…) 나루가 끓여 오는 냉이국을 김상헌은 마셨다. 국에 만 보리밥을 무말랭이를 얹어 먹었다. 김상헌의 목구멍 속에서 산과 들로 펼쳐지는 강토가 출렁거렸고, 온조 이후의 아득한 연월이 지금 이 시간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장편소설 <남한산성> )

쑥바지락시금치국
시간은 앞으로 가지 않는다

김상헌이 냉이국을 먹으며 '온조 이후의 아득한 연월'을 그리는 이 장면은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 <옛날에 대하여>를 떠올리게 한다. 이 소설에서는 오직 두 개의 시간만이 존재한다.

빅뱅 이전의 '옛날'과 옛날 이후의 '과거'다. 작가에게 시간이란 방향성 없이 양끝만 있는, 흐르지 않고 제자리에서 돌며 수직으로 쌓여가는 시간이다. 마치 지구가 공전을 시작하면서부터 끊임없이 계절의 순환을 거듭하는 것처럼 시간은 앞으로 가지 않고 제자리를 돌고 돈다.

마치 윤회 같은 이 개념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우리는 봄나물을 먹으며 돌고 도는 시간의 순환을 체험해 왔으니까. 윤대녕은 단편 '보리'를 통해 계절의 순환과 인연의 고리를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여기 매년 청명(淸明)에 만나는 연인이 있다. 봄이면 이들은 시골 온천에 들러 사랑을 나눈다. 말하자면 둘은 불륜인 셈. 어느 날 옛 애인의 선배를 만난 수경은 그에게 고백한다.

냉이만두
남자는 말한다. "청명에 내가 보리 같은 여자를 만났군." 그는 수경을 '보리'라고 부르는데, 그 생명력 넘치는 이미지의 보리는 유방암에 걸려 더 이상 그 남자를 만나기 어렵게 된다. 수경이 남자와 만나는 마지막 '청명' 날의 풍경은 아프다.

'냉이가 들어간 된장국에 밥을 말아먹다 수경은 소주를 시켜 두 잔을 거푸 마셨다. (…) "혼자 온 모양이지?" 눈을 피한 채 아주머니가 넌지시 물어왔다. "그냥 모른 척하세요. 온천 하러 온 거잖아요." "어련하겠어." 6년째 봄만 되면 도깨비처럼 나타나 수상쩍은 남자와 함께 사라지는 서른 중반의 여자를 보며 그녀인들 무슨 짐작을 못 하겠는가. 대꾸할 기력조차 없이 수경은 식당에서 나와 등 뒤로 문을 닫았다. 내년 봄에는 안 올지도 몰라요.'

우리가 참기름 묻힌 봄나물을 먹으며 그것이 '봄의 향'이라고 여기는 건 그 맛 때문이 아니라, 언 땅을 밀어 올린 그 몸짓이 연상되기 때문일 게다. 맵싸한 바람을 맞으며 뜯은 봄나물을 무쳐 밥상에 올린다. 아득한 연월의 시간이 우리 입 안에 들어온다. 여린 봄풀을 씹으며 시간의 순환고리 앞에서 선다. 갓 자란 날것의 풋내가 겨울과 여름 사이를 잇는다. 시간은 앞으로 가는 것만이 아님을, 우리는 밥상에서 체감한다.

'진도 봄동, 저것들을 길러냈을 저 전라도라 진도의 강인한 겨울벌판과 하루에도 수없이 오갔을 허리 굽은 할머니들의 부지런한 발걸음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진도 봄동, 좀 된발음으로 표기하면 마당가에 방금 눈 아기 봄똥처럼 더욱 파릇해지고 상큼하고 아삭거리는 진도 봄동.' (이시영 '봄의 내음')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