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와 작품 (9) 스캔들로젠버그 부부 스파이 사건 모티프 연상

중국 상하이 주재 한국 외교관들과 중국 여성 덩모씨의 불륜 파문이 확대되고 있는 가운데 9일 외교부 직원들이 서울 도렴동 외교통상부로 출근하고 있다.
"멀더, 진실은 저 너머에 있죠."

상하이 스캔들 기사를 읽다가 문득 미국드라마 대사가 생각났다.

중국 여인 덩신밍(鄧新明) 씨와 중국 상하이 주재 한국총영사관 영사 3명의 불륜 및 자료유출 의혹으로 시작된 이른바 상하이 스캔들. 현재는 총영사관 내 권력 암투 문제까지 제기됐고, 사건 조작 논란까지 가세해 사건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당사자인 김정기 전 총영사와 장 모 총영사, 제보자인 덩 씨의 남편 말이 전부 다르니 아직은 '논란' 내지 '스캔들'일 수밖에.

물론 각자의 경험과 감정과 그 감정이 얽혀 기억한 내용이 다를 터이므로 이 모든 것이 진실일 수도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무엇하나 시원하게 파헤치지 못하면서 '논란, 논란'을 남발하며 각 이해당사자의 말을 탁구공처럼 보도하는 기사에 대중은 클릭수와 댓글로 화답한다. 마치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처럼.

문학평론가 신형철 씨는 지난 해 한국일보에 쓴 칼럼 '우리가 본 바다'에서 이 풍경을 이렇게 썼다.

'사건 하나를 놓고 수십 개의 기사가 일제히 올라온다. 그런 기사들에서 가장 지겹게 등장하는 단어는 '논란'이고, 목마르게 찾아도 보이지 않는 단어는 '진실'이다. (…) 전장을 누비면서 피 흘리는 진실을 찾아내 부축하는 것이 위대한 기자의 일이 아닌가.'

하지만 이 글을 읽으며 언론이 가장 '진실하게' 감당할 수 있는 말은 오직 논란, 그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모두 제 위치와 경험과 이해관계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있으므로. 기자 역시 세계의 일부분을 제 깜냥에서 보고 듣고 판단하고 내뱉을 뿐이므로. 그러므로 경거망동하지 않고, 가장 '진실하게' 감당할 수 있는 기자의 말은 논란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제 발 밑의 현실만을 경험하면서, 그 경험과 경험으로 비롯된 가치판단이 보편적인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리고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기자에게 진실은 끝없이 추구하지만 결국 가 닿지 못할 미지의 이상향일 뿐이다. 고로 필자는 '이것이 진실이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학자가 진리를 보았다고 외치는 것과 같다. 사건이 현재진행형으로 진척되고 있을 때, 마감에 쫓겨 사건의 잘잘못을 검열관처럼 판단하는 기사를 써야 하는 기자는 외롭고 두렵다.

닥터로의 작품 <다니엘서>는 로젠버그 부부 스파이 사건을 모티프로 한 장편소설이다. 1953년 소련에 핵무기 기밀사항을 넘기기로 공모했다는 혐의로 전기의자에서 사형당한 로젠버그 부부 사건을 토대로 하고 있는 작품으로, 이들 부부는 좌우이념 대립의 시절 미국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고 있었다.

작가는 로젠버그 부부가 FBI에 체포 당해 전기의자에서 사형되기까지의 사건을 그들의 아들로 설정된 다니엘의 진술로 재구성하고 있다.

이 다니엘의 시선과 다니엘의 동생 수전의 시선이 엇갈린다. 수전은 이 시절 미국 내 인권운동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부모가 냉전시대 이념전쟁의 희생양이었다고 분노한다. 동생의 자살 후, 다니엘은 차분한 시선으로 '진실'을 추적해 나간다.

그것은 어떤 이해관계를 벗어나 제 눈으로 사실을 응시하는 것이고, 끝까지 제 부모의 스파이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다. 작가의 관심사는 부부의 유무죄를 밝히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에 관한 다양한 관점과 해석, 역사적 사건이 담론으로 변형되는 과정을 추적하는 데 있다.

상하이 스캔들도 로젠버그 부부처럼 다양한 사건과 관점과 해석이 모자이크처럼 얽혀 있을 것이고, 그것은 한 마디로 요약 불가능한 진실일 것이다. 한동안 언론은 논란만 반복해야 할 것이고, 그 사건을 '논란'으로 써야 하는 기자들은 외롭고 또 두려울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저 너머에 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