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회화전 - 옛 그림에의 향수]28년 만에 앙코르, 3원3재 비롯 다산, 추사 등 33명 작품 48점 선봬

탄은 이정의 '니금세죽'
시린 겨울을 지나 봄이 성큼 다가오면서 화랑가에도 봄 기운이 완연하다. 저마다 선명한 빛과 향기, 메시지를 앞세운 전시가 한창이다.

그런데 '현재'와 '질주'가 두드러져 눈에 머물고, 강박하는, 내용도 별반 다르지 않은 봄맞이가 태반이다.

이런 부산스러움 속에 인사동 동산방화랑의 걸음과 향은 남다르다. 시류를 거스르는 듯 당당히 내건 조선 고서화전의 '울림'이 예사롭지 않다. 지난 3월 15일부터 시작한 <조선후기 회화전-옛그림에의 향수>는 은근하고 그윽하며, 시공이 공존하는 여유와 사유를 전한다.

이것은 단순히 옛 그림을 전시하기 때문이 아니다. 1974년 개관한 이래 고서화, 한국화 기획전시를 이어온 동산방화랑의 정체성에, 또 다른 전통을 쌓아가는 지난한 열정이 더해져 일궈낸 것이다.

이번 전시만 해도 1983년 '조선시대 후기회화'전 이후 28년 만에 여는 대규모 기획전이다. 전시회 이름은 같지만 내용에는 차이가 있다.

공재 윤두서의 '주감주마'
"83년 전시가 3원(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3재(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관아재 조영석)와 조선후기에 이름을 남긴 화가 67명의 83점을 소품 위주로 많이 보여주려 했다면, 이번 전시는 조선 후기 회화사를 빛낸 분들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박우홍 동산방화랑 대표는 1983년 전시가 부친인 박주환 창업주에 의해 이뤄졌고, 이번 전시도 부친이 쌓아온 예덕과 인맥으로 가능했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고서화는 수량이 한정돼 있고 소장가들이 공개를 꺼려 전시를 열기가 쉽지 않다"며 "화랑 소장품에다 아버님과 인연을 맺어 온 소장가들, 그리고 화랑의 역사를 아는 분들이 도와주셔서 전시를 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전시는 1983년과 비교해 대작이 여럿이고 처음 공개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장르도 산수, 인물, 풍속, 화조, 사군자 등 다양하게 구성되었고, 당시의 문예적 분위기를 보여줄 수 있는 서예 작품도 다수 곁들였다.

3원 3재를 비롯해 추사 김정희 등 조선 후기를 빛낸 33명의 작품 48점 중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임진왜란 이전의 희귀 작품이다.

단원 김홍도의 '어해도'
탄은 이정(1541~1622)의 '니금세죽(泥金細竹)'쌍폭은 니금을 이용해 대나무를 그린 그림으로 댓잎이 위로 뻗어 올라가는 모습과 아래로 늘어진 모습을 두 폭에 표현했다. 전시 서문을 쓴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전 문화재청장)는 "탄은의 굳세면서도 능숙한 운필이 잘 살아나 있고, 대나무 그림들의 잎과 줄기에는 왕손다운 기품과 격조가 서려 있다"고 평했다.

또 다른 임란 전 작품인 '시고4수(詩稿四首)'는 조선시대 초서 서예가로 이름을 날렸던 고산 황기로(1521~1567)의 글씨로, 얼마 전 보물(제1625-2호)로 지정됐다.

'3원 3재' 작품으로는 단원 김홍도의 '게' 그림인 '어해도'(魚蟹圖)'가 스스럼없는 필치로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다. 고송유수관도인 이인문의 '수간모옥'은 맑고 조촐한 필치가 잘 살아나 있고, 홍월헌 김득신의 '엽피남무'는 아주 맑은 필치의 산수풍속화이다. 단원 아들인 긍원 김양기는 '화조영모' 8곡 병풍을 선보여 단원 일파의 그림을 종합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

오원 장승업의 작품 중에는 화조(花鳥)와 기명절지(器皿折枝, 그릇과 각종 화훼류)를 그린 병풍 '화조기명십곡병'이 출품됐다.

겸재 정선이 서울 북악산 정상 가까이에 있는 '부아암'을 그린 진경산수화와 빠른 필치로 활달한 인상을 주는 '하산관폭', 겸재풍의 산수화인 '독좌관수' 등도 나왔다. 겸재 일파인 김윤겸, 정충엽 등의 진경산수도 선보인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
산수와 화조에 능한 현재 심사정 작품으로는 '꿩' 그림과 '화조도', 특이한 구조의 '산수도'가 눈길을 끈다. 나비를 잘 그려 남나비로 불리는 일호 남계우의 부채꼴의 '구맥호접선면'도 나왔다

국보 '자화상'으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의 작품 '주감주마'는 술에 취해 말을 타고 가는 그림으로 그가 인물뿐만 아니라 말을 그리는 데서도 매우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표암 강세황의 산수도 '장송유혜도'는 표암 산수의 문기(文氣) 어린 분위기를, 초원 이수민의 '강선독조'는 문인의 아취(雅趣)를 잘 보여준다.

또한 당대 묵란도(墨蘭圖)에 능했으면서 대척관계에 있던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운미 민영익의 난 그림을 한 자리에서 비교해 볼 수 있다.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를 비롯한 서예 작품들은 전시회의 품격을 한층 높여 준다. 다산이 운명하기 5년 전에 쓴 글과 추사가 선면(扇面·부채 거죽)에 쓴 경구에서는 이들의 인품이 묻어나는 듯하다.

고산 황기로의 '시고4수'(보물 제1625-2호)
박우홍 대표는 "이번 전시가 미술사학계의 학생들에게 자료 가치측면에서 보탬이 되길 바란다"면서 "앞으로 1,2년 내에 조선시대 후기 회화 편만을 따로 모아 전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소설가 이병주는 선조들의 옛 그림을 감상하면서 쓴 '고인과의 대화'라는 글에서 "고인과 더불어 생각하는 곳에서 현대는 살이 찐다. 현대란 고인의 울력으로 아로새겨지는 미래의 산실"이라고 했다. 고인과 풍성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옛 그림에의 향수>전은 3월 28일까지 이어진다. 02-733-5877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