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와 작품] 카이스트 학생의 자살(13)재학생 대자보… 총장 "학점제 원점에서 검토" 밝혀

카이스트 전경
'날씨는 끝내주는데, 봄 타나? 우울하다'

지난 주말, 하늘 보면서 감탄하고 있던 찰나 친구에게서 문자를 받았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로스쿨에 들어간 친구는 늘 공부가 적성에 맞는지를 고민하면서도 악착같이 적응하려 애썼다. 한 달에 한두 번 전화나 문자로 서로의 안부를 물었는데 대화 내용에는 거의 항상 미래에 대한 불안이 끼어 있었다.

'고시는 다 없애버려야 돼. 사람 다 망가뜨려놓고 높은 자리 주니 인간들이 개판이지. 공부만 한 인간 중에 성격 반듯하면 그게 부처다.'

문자로 푸닥거리를 하고 다시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친구 모습이 그려졌다.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던 친구는 첫 학기 내내 법의 가치질서를 물어보다 "그런 건 여기서 공부하는 게 아니"라는 핀잔을 들어야만 했고, 3년 후 이렇게 끝내주는 날씨에 도서관에서 법조문을 달달 외우는 고시생이 됐다.

그렇게 진취적이고 논리적이고 창의적이던 친구가 도서관 책벌레로 변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인간은 구조 안의 동물이란 사실을 절감했다.

우리는 우리의 선함과 진심, 가능성과는 별개로 우리가 발 딛고 선 시스템에 편입되기 위해 타인 앞에 가면을 쓴 채 살아간다. 정확히 계량될 수 있게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수치화시켜 가면서. 그리고 때로 그 가면을 자신의 본령으로 느낄 때도 있다.

'서울특별시를 서울시나 서울로 쓰면 틀렸다고 가르치는'(친구는 로스쿨 채점 기준을 이렇게 말했다) 기준으로 몇 년쯤 평가되다 보면, 서울이 왜 특별시의 호칭으로 불려야 하는지, 왜 수도로 기능하는지, 기본을 망각하게 된다. 기본으로 되돌아가 가면을 벗는 순간, 시스템에서 퇴출된다. 그러니 이 구조 안에서 가능한 인간의 선택이란 이미 정해진 것이다.

올 초부터 잇달아 자살한 카이스트 학생들 역시 이 친구와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이들의 가능성은 평가항목에 따라 A부터 F까지 등급이 매겨지고, 성적에 따라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제한된다. 이 시스템에서 살아남으면 더 많은 경쟁이 펼쳐지고, 이 경쟁을 버티고 나면 또 다른 방식의 평가가 기다리고 있다.

<세 얼간이>는 인도의 공과대학을 무대로 한 영화다. 인도에서 공대 진학은 집안을 일으키는 출셋길이라 학부모들의 극성도 우리와 비슷하다. 학생들의 목표는 미국회사에 들어가 돈을 버는 것. 학교는 경쟁을 부추긴다.

"달에 처음으로 착륙한 사람은?" "닐 암스트롱입니다." "그럼, 두 번째 착륙한 사람은?" "…" "알 필요도 없다.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

권위적인 학장과 교수들의 처사에 희생자가 속출한다. 로봇엔지니어를 꿈꾸던 학생이 논문 제출이 늦어 졸업을 못하게 돼 총장을 찾아간다. 사정을 거듭해도 거절당하고, 결국 로봇만을 남겨둔 채 학생은 자살한다. 물론 영화는 얼간이의 승리로 끝난다. 얼간이는 말한다. 머리보다 가슴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야 한다고. 모범답안을 요구하는 학교에 역시 모범답안 같은 말로 펀치를 날린다.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지만, 현실은 당연하게도 그렇지 않다. 카이스트 학생들의 잇단 자살에 재학생들은 "학교는 우리를 컨베이어 벨트 위에 줄 세워 놓고 틀에 억지로 몸을 끼워 맞추도록 강요한다. 우리는 학점 경쟁에서 밀리면 패배자 소리를 들어야 했다"고 쓴 대자보를 붙였다.

총장은 공식 홈페이지에 "이 세상엔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라고 쓰며 응수했다. 그 사이 또 한명이 목숨을 끊었다. 총장은 학점제를 원점에서 검토할 것이라 밝혔지만, 경쟁과 숫자로 점철된 이구조는그대로굴러갈것이며, 가면을쓴채살아가야할것이다.

원고를 쓰며 다시, 친구의 문자를 뒤져본다. 그런데 계량화된 가면을 벗고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까?

'무슨 부귀영화 누리겠다고 서른에 이 짓인고. 시험 보고 돈 벌어서 학자금 대출 갚고 일하면 행복해지려나? 행복하기 참 힘드네. 사실 난 과일 먹으며 드라마 볼 때가 제일 행복해. 드라마, 보고 싶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