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 으로 창작판소리 12바탕 시동

인진택 명창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0여Km 떨어진 한강 남쪽, 넓은 뽕밭 잠실이 펼쳐지다가 갑자기 솟아올라 웅장한 산세를 자랑하는 꼭대기에 오래된 산성이 자리잡고 있으니, 이곳이 곧 남한산성이라. 경기도 광주 성남 하남 세 지역에 걸쳐 넓은 한강을 해자(垓字)로 삼고 있는 바, 그런즉 산성의 방략과 규모가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이 가는 일이로되, 이 남한산성 형세를 한번 살펴보겄다!"

무대 위엔 북 앞에 앉은 고수와 부채를 쥔 명창 두 사람밖에 없지만, 이윽고 아니리가 시작되면 어느새 남한산성을 둘러싼 역사의 대서사시가 관객의 눈과 귀를 압도한다. 춘향이나 심청이의 애끓는 사랑이나 별주부의 해프닝과는 또 다른 매력이 넘치는 판소리 <남한산성>의 도입부 모습이다.

창작판소리 12바탕 추진위원회(위원장 김도현, 예술총감독 임진택)가 경기문화재단의 후원으로 완성한 <남한산성>는 지난해 공개한 <백범 김구>에 이은 두 번째 창작판소리다.

<백범 김구>는 민족의 아픔을 비장한 각오와 해학의 웃음이 담긴 창작판소리로 승화시켜 국악계 관계자들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예상 외의 반응을 이끌어냈다.

서사의 전개에 따라 진양조에서 휘모리까지, 상황별로 적절한 장단에 맞춘 소리와 아니리는 관객들을 숙연하게 했다가 폭소시키며 판소리의 매력을 새롭게 알린 바 있다.

한승석 명창
두 번째 창작판소리 <남한산성>은 호국의 성지 남한산성에 얽힌 이야기를 병자호란을 중심으로 풀어내며, 남한산성의 고난의 역사를 비장과 해학에 실었다. 1부와 2부로 나뉘어진 이 작품은 명창 임진택과 명창 한승석이 각각 소리를 맡아 총 2시간 30분에 걸쳐 완창하게 된다.

김도현 위원장은 "첫 작품인 <백범 김구>가 우리 민족이 최근 백 년 동안 겪은 아픔과 기쁨의 역정을 담은 것이었다면, 이번 <남한산성>은 4백 년 전 우리 선조들이 겪은 수난과 불굴의 의지를 담으려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창작판소리 12바탕 추진위가 1년여에 걸쳐 준비해온 <남한산성>은 그동안 비공개 내부시연을 통해 남한산성 관계자, 판소리 전문가들 평가와 토론을 거쳐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왔다.

특히 전작에 이어 이번 작품도 정통 판소리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면서 일반관객들이 쉽고 흥겹게 관람할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창작됐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임진택 예술총감독의 행보가 창작판소리의 미래와 직결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창작판소리 3대 유파로 알려진 박동실 류와 박동진 류는 두 명창의 타계로 제자들에 의해 전승되고 있지만, 임진택 류는 앞으로도 동시대와 호흡하며 '새로운 판소리'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다.

공연에 쓰이는 남한산성 병풍
그가 젊은 시절 작창한 <오적>, <소리내력>, <똥바다> 등을 비롯해 직접 사설을 쓰고 작창한 <오월광주>에서도 이처럼 전통과 현대적 기법을 결합시킨 새로운 창작판소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남한산성>이 원래 새로운 창작판소리 12바탕의 목록에 들어있지 않았던 작품이라는 점이다. 임진택 예술총감독은 "당시 판소리 창작과 관련해 경기문화재단에 지원을 요청했을 때 염두에 뒀던 역사적 인물이나 장소는 여주에 능이 있었던 '세종대왕'이나 남양주 능 내에 생가와 묘소가 있는 '다산 정약용' 그리고 세계문화유산에 이미 등재돼 있던 '수원 화성'이나 '정조' 등이었다"고 밝힌다.

하지만 경기문화재단이 오히려 임진택 예술총감독에 제안했던 작품은 <남한산성>과 . 이들의 제안을 받고 임진택 예술총감독은 경기도가 직면해 있는 역사문화적 현안들을 납득하고 흔쾌히 작업의 수순을 수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창작을 위해 그가 먼저 한 일은 관련 사료들을 훑어보는 것이었다. 병자호란을 소재로 쓴 소설들도 그 대상이 됐다. 이런 과정에서 발견된 것이 김훈의 <남한산성>과 홍성암의 <남한산성>이었다. 임진택 예술총감독은 이처럼 정사와 야사를 아우르며 남한산성의 유래와 축성부터 쇠락과 복원에 이르는 남한산성의 대서사시를 완성시키기에 이른다.

임진택 예술총감독은 "창작판소리는 우리의 소중한 역사유적인 남한산성을 통해 새로운 활로를 열게 되고, 남한산성은 판소리를 통해 그 존재와 가치를 널리 알리게 됐다. <남한산성>이 이런 상생의 계기가 되어 기쁘다"고 소감을 밝히며 "앞으로 모든 역량을 다해 이 제휴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포부를 내비쳤다.

임진택 예술총감독과 창작판소리 12바탕 추진위원회는 현재 12바탕 중 <백범 김구>와 <남한산성>을 완성했고, 향후 <세종대왕>, <다산 정약용>, , <녹두장군 전봉준>, <홍길동> 등을 판소리로 창작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중 새로운 창작판소리의 차기작으로 유력한 것은 와 <다산 정약용>이다. 창작판소리 12바탕 추진위원회의 기획위원인 박화안 씨는 "내년이 다산 정약용의 탄생 250주년이 되고, 임진택 예술총감독도 이에 대해 많은 준비를 한 상태"라며 <다산 정약용>에 무게를 뒀다.

하지만 그는 "판소리가 반드시 옛날 역사만을 소재로 할 필요는 없으며 <백범 김구>의 예처럼 현대사를 다룬 판소리도 그 존재가치가 분명하다"며 의 공연 가능성도 넌지시 예고했다.

사설 집필부터 작창까지 1년이 넘는 준비기간을 거친 추진위원회는 11일 경기문화재단 다산홀에서 공개 시연회를 가진 후 29일 하남문화예술회관을 시작으로 5월부터 성남아트센터와 서울 남산국악당을 거쳐 9월 이후에는 복원된 남한산성 행궁 뜰에서 본 공연을 가질 예정이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