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한 작품과 푹신한 의자… 일상에 지친 관객 달래는 현대미술

장관이다. 깎아지른 절벽으로 물이 떨어진다. 힘찬 붓터치가 화면을 뚫고 나올 것 같다. 겸재 정선의 '박연폭포'를 대형 LED TV로 옮겨 움직임을 불어넣은 이이남 작가의 작품이다. 관객들이 그 앞에 앉는다. 스쳐지나가기는 아쉽다. 물의 꿈틀거림을 지켜본다. 말이 없어지고, 숨이 고르게 가라앉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관객들은 그만 잠이 들고 만다.

경기도 안산시에 위치한 경기도미술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다 <쉼> 전 때문이다. 제목대로 '푹 쉬라'는 뜻으로 편안한 작품과 푹신한 의자를 전시해 놓았다. 앉고 싶은 유혹을 떨쳐낼 수가 없다. 심지어 관객들을 거의 눕히는 의자도 있다.

거기 몸을 맡기면 저절로 강운 작가의 작품들과 마주하게 된다. 얇은 한지를 오려 붙인 곱디고운 하늘 풍경이다. 바람결까지 눈으로 만져지는 그 하늘 아래에서라면 누구든 꿈속을 헤맬 법하다.

"예술이 피곤한 이들에게 팔걸이 의자가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는 화가 마티스의 말을 본받은 듯한 이번 전시에서는 현대미술을 어렵고 멀게 느꼈던 관객들과 소통하려는 경기도미술관의 의지가 엿보인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미술관을 사람들이 휴식하는 제2의 가정으로 꾸민 것이다. 전시를 담당한 황록주 학예연구사는 "작품 내용뿐 아니라 관람하는 방식에서도 '쉼'이라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기획했다"고 말했다.

바다와 하늘, 나무와 숲 등 자연을 모티프로 한 작품들은 거실 벽에 걸린 산수화처럼 일상에 지친 관객을 달랜다. 김태균 작가의 푸른 바다는 잡념을 없애준다. 공중에 둥둥 떠 있는 거대한 민들레 씨앗은 노동식 작가의 작품이다.

이이남, '박연폭포'
민들레 씨앗 한번 불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어린 시절의 봄을 떠올리게 한다. 이명호 작가의 작품은 보는 순간 웃음 짓게 만든다. 뒤에 흰 캔버스 천 하나 펼쳤을 뿐인데, 특별할 것 없던 나무는 그림 같은 풍경이 된다. 발상의 전환이 재미있다.

박소영 작가는 아예 '짐을 내려놓고 편히 쉬세요!'를 선보였다. 형태가 분명하지 않은 이 색색의 덩어리들은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고 입꼬리를 처지게 하는 마음의 짐들이다. 현실에선 자유로울 수 없더라도 미술관에서만큼은 깜박 잊어버리라는 작가의 의도가 귀엽다.

김승영 작가의 작품은 관객을 먼 기억 속으로 데려간다. 언젠가 한번쯤 옷깃 스쳤던 이름들이 상영된다. 인연을 헤아리는 시간은 아련하다. 음악이 이 여행을 돕는다.

'안녕' 모양의 빨간 의자는 박용석 작가의 작품이다. 그 자체가 쉼터일뿐더러, 만나고 헤어지는 일에 대한 성찰이 담겼다. 누군가를 받아들이고, 또 거리를 두기 위해서는 잠깐 의자에 머무는 것처럼 한 숨 고르는 틈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미술관에서 마음껏 쉬는 것이 전시의 끝이 아니다. 문을 나서는 관객들에게 과제가 주어진다. 하나, 전시작들 사이에서 쉰 모습을 담은 '인증샷'을 메일로 보내면 우수작을 선정해 기념품을 준다. 둘, 그리운 사람에게 엽서를 쓰면 미술관이 맡았다가 가을에 보내준다. 세상에, 이렇게 다정한 미술관도 있다.

김태균, 'if you go away'
미술과 친해지고, 춘곤증도 치료할 수 있는 <쉼> 전은 6월 19일까지 열린다. 031-481-7000.


박소영, '짐을 내려놓고 편히 쉬세요!'
노동식, '민들레 홀씨되어...'
이명호, 'Tree #2'
박성수, '정원-고유영역'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