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작 줄리언 'Ten Thousand Waves'전

Maiden of Silence
2005년 영국의 한 바다에서 23명의 중국인 불법 이주 노동자들이 죽었다. 새조개를 채취하던 그들 중 누구도 영어로 된 경고를 해석하지 못했다. 밀물이 사정 없이 덮쳤다. 거기까지 어떻게 흘러왔는지 모를 몸들이 다시 세상 모르는 깊고 먼 데로 흩어졌다. 표류의 운명은 끈질겼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일이지만 영국 미술 작가 아이작 줄리언은 당시 기록을 찾아냈다. 영국 경찰의 CCTV 화면 속에서 그들의 죽음은 망망대해의 점으로 남았다. 검은 머리가 중국인임을 짐작하게 할 뿐, 어떤 신원도 드러나지 않는 죽음.

작가는 무엇을 보았을까. 그는 이 사건을 가운데 두고 중국의 마주 전설과 1934년작 영화 'The Goddess'를 엮어 하나의 해석을 만들어냈다. 영상 설치작 'Ten Thousand Waves'다.

마주는 바다에서 조난한 뱃사람들을 이끄는 중국의 여신이다. 그는 꿈에 나타나 '집으로 돌아가라'거나 '바다로 다시 나가라'고 일러준다고 한다. 'Ten Thousand Waves'에서는 배우 장만옥이 마주 역을 맡았다. 근심스런 표정으로 흰 옷자락을 펄럭이며 쉴 새 없이 산천과 도시를 굽어 본다. 어쩌다 그조차 23명의 외로운 죽음을 놓쳤을까.

1930년대 중국 상하이는 아이러니한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서구 열강들이 분할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물은 풍요로웠고, 풍경은 활기찼다. 영화 산업도 발달했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시각과 함께 왔다.

Red Chamber Room
그 화려한 시절의 복판에서 만들어진 'The Goddess'는 그러나, 어린 아들과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매춘까지 해야 했던 여인의 사연이다. 'Ten Thousand Waves'에서 배우 자오 타오를 통해 환생한 그녀는 과거의 영화와 현대의 천지개벽이 뒤얽힌 상하이를 끊임없이 헤맨다. 표류의 운명은 개인의 몫만이 아니었다. 시대를 건너 이어지고 있었다.

3개의 스크린에서 연달아, 동시에, 때론 제각각 이 세 개의 이야기가 상영된다. 서로 다른 시공간, 현실과 허구 간 경계가 허물어지고 연결된다. 마주는 시대를 알 수 없는 깊은 산 속과 마천루가 점령한 현재의 상하이를 넘나든다. 여인이 있는 상하이가 1930년대인지 그 때를 재현한 세트장인지 알 수 없다.

이 모든 상황이 어쩌면 2005년 영영 물 속으로 잠겨든 사람들의 꿈인지도 모른다. 혹은 자본을 쫓아 표류하는 역사와 삶에 대한 작가의 애도인지도.

"가슴까지 차오르는 물/ 나는 아들이 자라는 걸 지켜볼 시간이 없네/ 제발 내 뼈를 고향으로 보내주오." 배경음악처럼 되풀이되는 시인 왕핑의 문장들은 주문 같다.

오늘도 영국의 바닷가를 넘실거릴 파도는 무심하다. 작품의 막바지, 중국 서예의 대가 공 파겐이 유리창에 쓴 글씨는 세정제를 든 젊은이들의 손에 금세 지워지고 만다. 역사는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Ten Thousand Waves'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위치한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7월17일까지 전시된다. 2010년 시드니 비엔날레를 시작으로 중국 상하이, 미국 마이애미, 영국 런던 등에서 9채널로 전시되었던 이 작품이 국내에서는 3채널로 선보인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