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空想'
어릴 적, 도화지에 색색의 크레파스를 가득 칠한 후 그 위를 까만색이나 푸른색 크레파스로 다시 덮어 못으로 긁어냈던 회화 기법을 기억하는지? 데칼코마니만큼이나 대중화한 그림 기법은 어린 손으로도 꽤 오묘한 완성품을 만들어냈었다.

작가 이정은의 회화를 찬찬히 보면, 어릴 적 그렸던 그 그림들이 떠오른다. 아기자기한 사물들과 오색의 알록달록함이 어우러져 동심이 묻어난다.

푸른빛의 배경은 자칫 그림을 차갑게 만들 수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따뜻한 오브제와, 물에 빠진 듯 살짝 바랜 색채가 작품을 전반적으로 온화한 분위기로 만들었다. 작품의 이미지는 대상을 그대로 옮기지 않았지만, 관람객에게 거의 즉각적으로 바다 속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는 작가가 대상을 보고 느낀 추상적인 감상을 화폭에 그대로 옮겨냄과 더불어 바다가 가지는 공통적 특성을 탁월하게 잡아냈기 때문이다.

아르코 미술관의 최흥철 연구실장은 "상상 이상의 기이한 여행을 시각적이고 구체적으로 재현하는 것보다는 텍스트 기반의 추상적 기술법이 모호한 이미지를 더욱 더 모호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며 이정은의 추상화를 설명했다.

직접적으로 장면을 제시하기보다 에둘러서 간접적으로 묘사한 풍경이 오히려 더 폭발적인 감상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재료에 대한 이해와 적절한 색채로 따뜻한 자연 풍경을 나타낸 작가 이정은의 작품들은 자연의 따스함을 보여주면서 우리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94년부터 꾸준한 전시를 이어왔던 작가가 전의 바다 풍경으로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4월 21일부터 5월 19일까지. 갤러리 비원. 02)732-1273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