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처럼 우화적이고 독특한 작품 세계추모 2주기 맞아 '김점선 그리다' 출판

사진작가 김중만이 찍은 김점선 화백
문학계에 이외수가, 대중음악계에 조영남이 있다면, 미술계에는 김점선이 있다. 독자적인 예술 활동에 두각을 나타내면서도 각 분야에서 기인으로 여겨지는 이들이다.

점심시간, 혼자 다른 메뉴를 시키는 것조차 눈치 보일 정도로 튀거나 다른 취향을 이해하지 못하는 몰취향의 사회. 어쩌면 그들에게 '기인'이란 딱지를 붙이며 내키는 대로 살지 못하는 용기 없는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대의 걸출한 '기인'이었던 김점선 화백이 63세를 일기로 우리 곁을 떠난 지 2년이 지났다. 꽃과 오리, 말 등을 소재로, 마치 샤갈처럼 우화적이고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이화여대 철학과를 나와 미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생을 살 것 같았던 그녀는 다시금 홍익대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생전 그녀가 말했듯 자신의 이름처럼 '점'과 '선'으로 이뤄진 미술을 하게 된 건 숙명과 같았다.

헝클어진 머리와 시원시원하고 거침없는 말투, 호불호가 강했던 김점선의 개성만큼이나 화백으로서의 행보도 거칠 것이 없었다. 제1회 앙데팡당전에서 백남준, 이우환의 추천으로 파리 비엔날레 출품 후보에 선정되며 등단(1972년)한 후, 2년 연속 평론가협회 선정 미술 부문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로 선정(1987~1988년)되었다.

'김점선 그리다' 표지
그의 인생을 닮아 격식도 없이 자유로운 그림은 지극히 순수했다. 김점선 화백의 오랜 지인이었던 고 박완서 작가는 "대상의 위선을 걷어내고 직통으로 본질을 포착한" 그림이라며 그 순수성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그림 속 사물을 작가의 주관대로 과장하고 변형하는 기법을 미술 용어로 '데포르마숑(Deformation)'이라고 한다. 김점선의 대담하고 자유로운 그림의 특징이기도 하다.

왕성한 창작욕을 지녔던 김 화백은 개인전만 60여 차례를 열었다. 오십견이 와서 붓을 잡을 수 없을 땐, 노트북 그림판에 그림을 그려 판화지에 출력한 '디지털 판화' 작업을 시작했다.

그뿐인가. '10cm 예술' '나는 성인용이야' '나, 김점선> 그림동화 시리즈 '우주의 말' 등 10여 권을 왕성하게 저술해왔으며, 화장기 없는 얼굴로 KBS TV '문화지대'에 나와 약 1년간 진행자를 맡기도 했다.

2007년 암 판정을 받은 후에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담은 동화 시리즈를 기획해 1백 권의 그림동화책을 내겠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언급한 <우주의 말>을 비롯한 몇 권의 책은 다행히 출판이 되었다.

병환 중에도 쉬지 않았던 예술활동은 그의 평생의 작품이 그래왔던 것처럼, 인생의 굴곡과 깊은 고통 속에서 잉태되었기에 눈이 시릴 만큼 순수한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같이 순수하기에 그 아픔을 말없이 감내했는지도. 생활이 팍팍해질수록 그녀는 말과 오리, 고양이, 토끼와 수많은 꽃송이를 캔버스 가득 채워냈다. 어린 시절 환희의 순간들을 길어 올리고 사물의 본질을 포착한 순간, 비로소 김점선 식의 그림은 완성되었다.

김점선 그림, 김중만 사진, 2005 토포하우스, 캔버스 천 위에 사진을 프린트하고 그린 작품
김점선 같은 화백을 떠나 보내 활기를 잃은 예술계에, 그녀의 추모 2주기를 맞아 그녀가 책이 되어 돌아왔다. '김점선 그리다'(문학의 문학). 김점선을 아끼고 오랫동안 친분을 나눠온 지인들이 그녀를 그리워하며 적은 글과 더불어 그녀가 그린 그림과 글이 적힌 책이다.

김점선의 미발표 작품 12점, 고 박완서 작가를 비롯한 고 장영희 교수, 이해인 수녀, 정호승 시인, 최인호 작가, 사진작가 김중만 등 각계각층 인사들이 뜻을 모았다.

'그냥, 우리 전처럼 가끔 만나 쓸데없는 시간 보내다, 잘 가, 잘 지내, 하자. 그렇게 우리 같이 지내며 이 가슴 시리게 아름다운 세상의 찬가, 더, 조금 더, 불러보자.'(김중만) 김점선 화백과 얽힌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이들의 그리운 한마디, 한 문장이 그녀의 그림과 김중만의 사진과 함께 가슴 뭉클하게 맺힌다.

김점선 화백과 오누이처럼 지냈던 권용태 시인은 몇 달 전, 경기도 광주 기여리에 위치한 사저에 '권용태&김점선 문화마당'이란 이름으로 자그마한 복합문화공간을 꾸몄다.

또 김중만 작가는 최근 캄보디아에 김점선 미술학교를 건립했다. 김점선기념사업회(회장 권용태 시인)와 플랜(Plan-개발도상국 아동 후원단체)과 손잡고 한번도 붓을 잡아본 적 없는 캄보디아 어린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학교다. 지난 6월 28일 개교식과 현판식을 했고, 이곳에서 20여명의 아이들이 화가의 꿈을 키우게 된다.

해외여행 한번 해보지 않은 김점선이었다. 10여 년간 제주도에도 가지 않았던 그녀의 예술혼이 먼 땅 캄보디아에서 다시금 피어 오른다.

"하늘나라에 있는 김점선 화백을 처음으로 해외 나들이를 시킨 게 아닌가. 자기의 예술 혼을 해외의 척박한 환경에 심어준다는 것에 대해 하늘나라에서 무척 기뻐할 거라 생각한다."(권용태 시인)

김점선기념사업회는 추모 3주기를 맞는 내년에는 좀 더 큰 꿈을 구상 중이다. 경기도 여주군에 위치한 화가마을에 김점선 미술관 건립을 추진하는 것과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일이다. 누구보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많이 가진 김점선 화백의 이야기는 이제 새롭게 시작되고 있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