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구 개인전 '먼 그림자-산성일기'굴욕의 역사 병자호란의 상징 26점 회화 작품에 담아

'행궁', 캔버스에 아크릴, 2011
역사는 시간이 축적된 침묵의 언어다. 그에게 말을 걸고, 그가 말하게 하는 것은 오롯이 현재를 사는 자들의 몫이다. 역사가 크로체가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고 한 것이나 '역사란 과거를 돌아보고 현대를 살피며, 미래를 전망한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 역사도 마찬가지다. 영광의 역사든, 치욕의 역사든 그것이 의미를 가지려면 현재로 불러내 대화를 해야 한다. 그 방식은 다양하다.

강경구 작가는 굴욕의 역사로 기록돼 있는 병자호란을 남한산성이라는 상징으로 화폭에 담았다. 서울 안국동 사비나미술관에서 6월 15일부터 전시하고 있는 열다섯 번째 개인전 <먼 그림자 - 산성일기>를 통해서다. 남한산성에 얽힌 과거의 역사와 현재를 오버랩시킨 26점의 회화 작품이 저마다의 개성으로 강렬하다.

남한산성은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면서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의 무릎을 꿇은 비극적인 역사의 장소다. 하지만 그런 남한산성은 곧잘 잊히고, 음울한 군대교도소 이미지나 술집과 음식점, 모텔이 가득한 위락지로 인상 지어져 왔다.

강 작가는 그 비참했던 역사적 장소가 현대에 와서 훼손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바탕으로 실제와 허구의 인물이 못 다 들려준 많은 이야기를 작품으로 재구성해 드러내고자 했다고 말한다. 소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1636년 12월 14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47일간의 시간을 그린 작품이다.

'붉은 나무1', 캔버스에 아크릴, 2011
작가는 남한산성이라는 장소와 그것이 지닌 특별하고 가슴 아픈 과거를 비틀린 소나무, 원근법이 무시된 기와 건축물 등의 형상에 투영시켰다. 그는 안료를 덧칠하고 때로는 목탄으로 선을 그어가면서 남한산성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역사의 충돌을 드러내고, 현대인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과거의 공간과 역사적 사건들을 그림으로 끌어들인다.

"남한산성의 이야기는 오늘의 현상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며 매우 입체적인 조망과 상상력이 뒤따라야 합니다. 남한산성의 장소적 특징이라는 일차적 소재를 넘어 그 속에 실존했던 과거의 복잡한 면모들을 여러 단계를 거쳐 상징화하려고 했습니다."

작가는 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기억을 다루고 있다. 풍광을 음미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붓질은 병자년의 기억을 되살리고 삼학사의 역사를 불러낸다.

강력한 원색과 거친 붓 터치, 세부적인 표현이 생략된 형태는 원초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면서 웅크리고 멈추어 있는 풍경에 새로운 생명과 울림을 부여한다.

그림들은 소설 <남한산성>의 장면을 떠올리며 김훈식 표현법처럼 건조하고 무뚝뚝하지만 예리하게 가슴을 저민다.

'나루', 캔버스에 목탄, 2011
작품 '행궁'을 보자. 400여 년 전, 사면초가의 상황이 극명하게 전개되었던 남한산성 행궁은 조용하고 단아해 보이는데 행궁 뒷편에 잘린 목을 안고 가부좌를 하고 있는 형상은 이곳에서 악전고투해야 했던 인조와 그의 백성들이 비참하게 스러졌던 굴욕의 역사를 암시한다.

행궁 안의 공포와 불신을 말해주는 작품 '떠도는 이야기'는 항쟁을 주장하는 척화파와 항복을 주장하는 주화파 사이의 논쟁이 전쟁의 포화보다 뜨거웠다고 한 <남한산성>의 장면을 떠올린다. 작품 '현절사'는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지조와 잘린 세 개의 머리가 이번 전시를 밝히는 화두처럼 다가온다.

주목되는 것은 '나무' 연작이다. 작품에서 소나무는 역사를 매개하고 기억을 불러오는 시간적 기제다. 소나무는 병자년의 아픈 역사와 굴욕의 현장을 목도한 증언자다. 검붉은색을 띤 소나무('붉은나무')는 암울했던 역사를 고발하며, 울혈처럼 뭉쳐진 녹색의 솔잎은 고통의 시대를 살다간 일원들, 억울한 죽임을 당한 영혼들을 은유한다.

전시에는 <남한산성>에서 역사의 진정한 주체로, 희망으로 상징되는 인물도 보인다. 작품 '겨울'에 원군의 지원 요청을 위해 척화파 김상헌의 명을 받고 몰래 성을 빠져나온 대장장이 서날쇠의 모습은 당시의 스산한 상황을 실제처럼 전한다. 목탄으로 그린 '나루'는 김상헌의 칼에 베인 뱃사공의 딸로 말 뿐인 충절과 명분보다 본질적인 민초들의 삶의 기준을 보여준다.

강 작가는 <남한산성>이라는 역사소설을 바탕으로 참혹한 역사의 현장이며 미래를 향한 우리의 삶의 현장이기도 한 '남한산성'이라는 장소를 일깨운다.

'헌절사', 캔버스에 아크릴, 2011
역사소설은 단순히 지나온 과거-역사의 재현이 아니라 진실이란 프리즘을 통해 그것을 다시 보게 한다. 그래서 오늘의 삶과 자기 정체성을 되비쳐 볼 수 있는 유력한 준거의 틀이 된다.

그러고 보면 강 작가의 전시가 전하는 '남한산성'의 메타포는 소설 <남한산성>의 지향점과 무척 가까운 거리에 있다.

김훈의 <남한산성>으로 인해 남한산성을 찾고 답사, 순례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남한산성이 역사의 장소로 온전하게 자리매김해가는 셈이다.

이번 <먼 그림자 - 산성일기>전 역시 작가의 독특한 시각에서 조명된 남한산성과 지난 400여 년 간 퇴적된 시간을 체험할 수 있게 한다. 전시는 7월 15일 까지. 02)736-4371


'겨울', 캔버스에 아크릴 2011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