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백건우, 그리고 리스트 수퍼스타 피아니스트 다각적 조명

피아니스트 '백건우'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악보를 재현하지 않았다. 마치 천재적인 아티스트가 즉흥연주를 하듯, 주도권은 전적으로 그에게 있었다.

감정선을 해석하고 유추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감정선을 구축한다고 해야 할까. 30여 년 만에 그의 무대에 세워진 리스트는 '재림'이라는 말로는 감히 설명되지 않았다. 그는 이미 그 자체였기 때문에.

6월 19일과 25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백건우는 두 차례에 걸쳐 리스트를 다각도로 조명했다. 19일에는 문학에서 영감 받은 작품으로 이뤄진 <문학 그리고 피아노>를, 25일에는 <후기 작품, 그리고 소나타>를 선보였다. 기자는 두 번째 공연 날 객석에 자리했다.

한 작곡가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생애와 창작의도까지 깊숙이 파고드는 방식은 백건우의 오랜 작품 해석 방식이다. 라벨로 시작된 백건우의 전곡 연주회는 스크랴빈, 리스트, 베토벤, 메시앙 등으로 이어졌다. 리스트의 전곡 연주회는 이미 1970년대 런던과 파리에서 6차례에 걸쳐 열린 바 있다. 그로 인해 유럽에서 그의 입지는 확고해졌다.

광기 어린 기교로 당시 슈퍼스타급의 피아니스트로 군림했던 리스트에겐 단지 그런 면만 존재하지 않았다. "집시와 종교인, 전혀 다른 두 면이 공존하는 리스트의 여러 모습을 그리고 싶다"던 백건우의 의도는 후기 작품을 통해 여실히 보여졌다.

이들 작품 속에는 화려한 명성 뒤에 숨겨진 고독과 생의 관조 그리고 조국인 헝가리를 향한 그리움이 응축되어 있다. '라 캄파넬라', '헝가리안 랩소디', '사랑의 꿈'으로 리스트의 작품 세계를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경솔한 일인지, 백건우는 말없이 깨우쳐주고 있었다.

강한 헝가리적 색채로 리스트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5곡의 헝가리안 포크송'과 아름다우면서도 애수에 젖은 '슬픈 곤돌라 2번', 그리고 국내에서 좀처럼 연주되지 않는 '로망스'와 중기의 걸작인 '스케르초와 행진곡'는 빼어난 기교와 정력적인 연주로 청중의 가슴속을 깊게 내리쳤다.

2부의 연주곡은 리스트의 유일한 소나타 b단조였다. 백건우는 충돌과 융합이 뒤섞인 리스트의 대작에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수천 명의 청중이 숨죽인 채 응시하는 그곳엔 땀에 흠뻑 젖은 우리 음악계의 거대한 산이 자리하고 있었다. 긴 침묵 뒤에 터진 기립박수는 수차례의 커튼콜로 이어지며 말없이 백건우를 향해 경의를 표할 뿐이었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