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선, 김홍도] 국립창극단ㆍ무용단ㆍ국악관현악단 의기투합 '가무악극' 공연

시간이 멈춘 것 같던 빛 바랜 화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춤꾼이 날아갈 듯 장삼을 휘날리며 덩실덩실 어깨춤 추고, 장터로 향하는 이들은 고삐를 당겨 말을 재촉한다. 점괘를 봐주는 스님에게 시주하는 기생의 한숨 섞인 넋두리도 바람결에 들려온다.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처럼 그림 속 등장인물들은 말을 하고 노래하고 춤을 춘다. 왁자지껄 떠드는 장터 사람들이나 씨름으로 힘을 겨루는 남자들, 그리고 나룻배로 강을 건너는 인간 군상은 금방이라도 말을 건네올 듯 생생하다.

이들은 모두 조선시대 화가 단원 김홍도(1745~1806년경)의 손 끝에서 나왔다. 현동자 안견, 겸재 정선, 오원 장승업과 함께 조선시대 4대 화가로 꼽히는 그는 누구보다 친숙한 그림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국적 정서를 화폭에 담아낸 김홍도가 국립극장에서 되살아났다. 지난 7월 8일에 막을 올린 국립극장 국가브랜드공연 <화선, 김홍도>가 16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된다. '가무악극'으로 명명된 공연 속에는 한국적 뮤지컬처럼 노래와 연극, 춤이 한데 어우러진다.

국립극장 소속의 국립창극단, 국립무용단, 국립국악관현악단이 한데 에너지를 모은 덕이다. 세 단체가 의기투합한 공연은 거의 10년 만이다. 여기에 연출가 손진책과 작가 배삼식이 가세해 전체적인 틀을 짜고 살아있는 그림을 완성했다.

공연은 액자 구성으로, 이야기는 김홍도가 세상을 떠난 지 수십 년이 지난 시점에서 출발한다. 김홍도의 그림을 아끼는 조선시대 중인 김동지는 친구 손수재에게 빌려준 단원의 그림을 돌려 받으러 그의 집을 방문한다.

하지만 손수재는 간데 없고 그의 방엔 김홍도의 마지막 작품으로 추정되는 <추성부도>만이 자리하고 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손수재의 목소리. 그 소리가 시작된 곳은 다름아닌 <추성부도> 속이었고, 손수재를 끌어내기 위해 손 내민 김동지는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다.

김홍도를 찾아간 그곳엔?

1745년, 김홍도는 평범한 중인 집안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재주가 뛰어나 그림 신동으로 소문이 났고 강세황에게 체계적으로 그림을 배웠다.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그림 업무를 관할하던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고 이후 승승장구했다. 영조의 생일을 기념한 병풍을 만들기도 했고, 정조의 초상화를 그린 이도 그였다. 나이 서른이 되기도 전에 조선 최고의 화가로 명성이 자자했다.

가무악극 <화선, 김홍도>에 나오는 대사처럼 그는 '환쟁이로는 분에 넘치는 영화를 얻었고, 집 앞에는 그림을 사려고 줄 선 사람으로 넘쳤다.' 정력적으로 그림을 그리며 수많은 작품을 남기기도 했지만 풍류도 즐길 줄 알아 즉흥적으로 한시를 지어내거나 거문고를 뜯으며 음악을 즐겼다고도 전해진다.

화려한 시절을 뒤로 한 채 쓸쓸한 말년을 보낸 그의 심정이 전해지는 <추성부도>. 가무악극 <화선, 김홍도>에는 이 작품을 비롯해 일고여덟의 단원 작품이 등장한다. 당대를 살던 보통 사람들의 일상과 풍속을 읽어낼 수 있는 풍속화들이다.

말을 탄 이들이 줄지어 가는 <장터길>은 시골 장터의 풍경을 보여주고, <무동>과 <씨름>에서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여가와 여흥의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유교를 숭상하던 시절 스님들 일상의 단면은 <시주>를 통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당시의 가장 유용한 교통수단의 하나가 나룻배였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무대 위에 떠오른 작품 이미지는 실제 김홍도의 손길이 닿은 듯 디테일하다. 5대의 프로젝터와 24m의 대형 스크린, 3개의 샤막 등의 거대한 영상 매커니즘이 아니었다면 그림 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어린 시절의 김홍도와 날개를 퍼덕이는 새들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지워 열린 공간은 그림 속의 인물들이 현실과 환상 속을 넘나드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간 김동지와 손수재는 이들 작품 속을 오가며 단원 김홍도를 찾아 다닌다. 목적은 그림에서 빠져 나오기 위함이었지만, 그 여정을 통해 그들은 김홍도가 누구보다 당대 보통 사람들의 곁에서 그들과 호흡하고 그들 삶을 관찰했음을 알게 된다.

22인의 국립국악관현악단과 10인의 서양 실내악, 그리고 정가 코러스는 한국적 정서가 좀 더 짙게 배인 채 아름답게 어우러진다. 특히, 2막에서 어른 김홍도와 아이 김홍도가 함께 부르는 '가을소리, 아이의 탄식'과 아이 김홍도의 '오라, 바람이여'는 <추성부도>의 정서를 가장 잘 드러낸다.

박철호와 성기윤, 두 뮤지컬 배우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는 점이나 마당극의 대부인 손진책 연출과 서민 곁에 머물던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매칭은 국립극장이 대중들에게 한발 더 다가왔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가볍게 작품을 무대에 재현하는데 그쳐 당대의 사회상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없다는 점과 손진책 연출가의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맛이 제대로 살지 못한 데는 아쉬움이 남는다.

<화선, 김홍도>는 오는 7월 16일까지 공연되며, 10월 세계국립극장페스티벌 폐막작으로 공연된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