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나가 직접 기획ㆍ프로듀싱, 6편 작품 이어지는 갈라 공연

컨템포러리 발레의 시도가 드문 국내에서 발레리나가 직접 '판'을 벌였다.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의 솔리스트 김세연이 기획하고 유니버설발레단 객원 수석무용수 임혜경과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김지영이 출연하는 '플라잉 레슨'에 패션디자이너, 설치미술 작가 등 타 장르 작가들이 함께 참여하는 콜래보래이션 공연이 마련된 것이다.

'스스로 날아보자' 발레리나 맞춤형 공연

해외 발레스타 초청 공연도 아닌데 각 발레단을 대표하는 발레리나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세 사람의 팔과 몸이 교차되면서 나타나는 다소 들뜬 동작들은 단지 관객으로서의 느낌은 아니다.

그만큼 경력도 소속도 다른 당대의 세 발레리나가 함께 춤을 추는 자리는 본인들에게도 흔치 않은 기회다. 마치 19세기의 발레마스터 쥘 페로가 발레스타 4명을 모아 무대에 올린 '파 드 카트르'를 연상시킬 정도다.

하지만 이번 공연은 발레리나가 직접 기획하고 프로듀싱한 공연이라는 점에서 '파 드 카트르'와 엄연히 다르다. 이번 공연을 기획하고 네덜란드 까지 섭외해 일정을 조율한 김세연은 "몇 년 전에 예술의 전당에서 키네틱 조명을 만드는 조민상 작가의 작품을 보고 그것을 발레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해 직접 공연을 진행하게 됐다"고 설명한다.

발레리나 김지영
이번 공연은 네덜란드의 무용수이자 안무가인 피터 령이 세 발레리나를 위해 새로 안무한 작품을 처음 선보여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해외의 유명 안무작을 그대로 가져오거나 국내 안무가의 창작이 주가 되었던 그간의 창작 관행에서 보면, 해외 안무가가 온전히 국내 무용수들만을 위해 안무한 이번 공연은 자연스럽게 흥미를 끌 수밖에 없다.

이번 공연은 '플라잉 레슨'이라는 제목으로 무대에 오르지만 하나의 작품은 아니다. 여섯 편의 다른 작품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갈라 공연이다. '미노스(Minos)', '회색의 방(The Grey Room)', '나를 마셔, 나를 먹어(dRiNk Me, eAt Me)', '발레 101(Ballet 101)'의 네 작품이 1부를 이루고, '플라잉 레슨(Flying Lesson)'과 '비(La Pluie)' 두 작품이 대미를 장식한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많은 네 작품에 출연하는 김지영은 "기존의 갈라 공연이 클래식 발레 중심으로만 이루어진 반면 이처럼 컨템포러리 발레로만 이루어진 갈라는 우리로서도 흥미로운 작업이다"라고 말한다.

네덜란드에 있는 김세연과 계속 연락을 취하며 1년 반 전부터 이번 공연을 준비해온 그녀는 "'미노스'를 통해서는 몸의 아름다움을, '플라잉 레슨'에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볼거리를, '나를 마셔, 나를 먹어'에서는 혼자 심각해서 오히려 바보 같은 등장인물의 모습에 주목하라"고 추천한다.

세 명 중 가장 선배인 임혜경은 오히려 자신만의 연륜이 묻어나는 '회색의 방'에 더 많은 애정을 드러낸다. 이 작품은 피터 령이 자신의 조부모의 사진에서 상상력을 얻어 만든 나이든 커플의 듀엣으로, 오랜 시간 서로를 너무 잘 알면서 서로에 대한 의미가 불분명해지는 회색빛 커플의 모습을 담고 있다.

발레리나 임혜경(사진 강영호)
임혜경은 "다양하면서도 복잡한 감정을 회색처럼 아득하게 표현하는 게 쉽지 않아 고민 중이다"라고 말한다.

'컨템포러리' 이름 아래 모인 아티스트들

하지만 이번 공연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역시 한국에서 초연되는 두 신작 '나를 마셔, 나를 먹어'와 '플라잉 레슨'이다. 특히 세 명의 발레리나가 한 무대에 서는 '플라잉 레슨'은 발레 외에도 설치미술과 패션이 협업한 컨템포러리 아트의 진수를 보여주며 타이틀 롤을 맡게 됐다.

이 작품에는 모티프가 된 조민상 작가의 키네틱 조명작품 외에도 다양한 모티프들이 담겨 있다. 의 전작인 '퍼스널 스페이스'를 비롯해 안나 파블로바의 '빈사의 백조', 그리스 신화의 '이카루스 이야기'와 안데르센의 '빨간 신'도 작품의 곳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이카루스가 바다에 떨어졌을 때 님프들과 만나게 되고, 그중 한 명이 날아가면서 빨간 신의 텍스트가 연결된다. 다른 시대의 텍스트들이 '비행'이라는 키워드로 조합된 아이디어도 인상적이다.

안무가 피터 령
조민상의 키네틱 작품은 새들의 둥지 혹은 새장으로 표현된다. 새장 속에 갇혀 날지 못하는 새들의 모습에선 더 높이, 오래 새처럼 날고 싶어하는 발레리나들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평생 비행연습을 반복해온 실제 세 무용수들의 등에는 오랜 날갯짓의 흔적처럼 얇고 단단한 근육들이 미세한 움직임으로 시선을 끈다.

그래서 의상을 맡은 패션디자이너 이재환도 "콜래보레이션이어도 중심은 발레다. 춤의 본질을 받쳐주기 위해 각 작품마다 절제되면서도 우아한 느낌이 나도록 디자인했다"고 의상 콘셉트를 설명한다.

'나를 마셔, 나를 먹어'는 피터 령 안무가의 '퍼스널 스페이스'와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출발한다. 작은 상자 안의 좁은 공간을 차지한 무용수의 모습을 다룬 '퍼스널 스페이스'와, 앨리스가 음료와 음식을 연달아 먹고 작아졌다 커졌다 했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에임스 룸(같은 크기의 사람이 차이나게 보이는 착시 효과를 일으키도록 설치된 방)'에 적용시킨 것. 한국에서 이 설정은 열려진 상자처럼 무대에 확장돼 착시 효과는 무용수들의 실제 몸과 스크린 속의 몸 두 개로 변주된다.

피터 령 안무가는 "이번 작품들에 숨어 있는 많은 아이디어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지만, 관객들에게 그것을 구체적으로 전달하기보다 몸을 통해 다양한 감상이 느껴지도록 안무했다"고 안무의 방향을 밝힌다. 하지만 '퍼스널 스페이스'의 흔적에 대해서는 "어떤 속박에서 벗어나 날고자 하는 자유에의 의지는 '플라잉 레슨'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 공연은 다양한 보조장치의 효과와 다채로운 설정으로 컨템포러리 예술다운 파격과 시각적인 실험이 돋보이지만, 결국 중심이 되는 것은 춤과 몸이다. '비'가 이번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발레의 재미를 느끼게 해줄 '플라잉 레슨'은 22일부터 이틀간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공개된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