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남극 세종기지에 예술가 파견 레지던시 프로그램 사전 워크숍

다큐멘터리 <불편한 진실>
예술은 종종 인간이 경험하기 힘든 미지의 공간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곤 한다. 영화는 우주나 해양에서 새로운 공포의 소재를 끊임없이 발굴하고 있다. 극지 환경 역시 마찬가지다. 극지는 일반인들이 평생 한 번도 가보기 어려운 곳인 만큼, 사실상 지구 안의 외계(外界)라고 할 수 있다. 영하 40~80도의 혹한과 낮과 밤이 몇 달씩 계속되는 그곳은 어떤 곳일까.

이 원초적인 호기심을 예술적 영감으로 바꿀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이번 달부터 예술가의 집에서 열리고 있는 '아트-사이-아트(Arts-Sci-Arts)'는 극지과학에서 예술의 새로운 모티프를 모색하는 프로그램이다.

삭막한 극지 환경에서 웬 예술?

한국문화예술위원회(ARKO)와 한국해양연구원 부설 극지연구소가 공동 추진하는 이번 프로그램은 예술과 과학의 융합 활성화를 위해 마련된 것으로, 11월 남극 세종기지에 예술가를 파견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 'Polar Sci-Art'의 사전 워크숍으로 기획됐다. 남극으로 떠나기에 앞서 극지 환경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시간인 셈이다.

ARKO가 자체 기획한 이 레지던시는 극지연구소와 협력해 과학, 환경, 생태 이슈와 관련한 창작작업을 하는 예술가들에게 이제껏 없었던 새로운 창작 기회를 제공한다는 취지에서 출발한다.

노진아 작가의 <미생물>
류재수 교류협력부 차장은 "우리에게도 극지 자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들이 해외의 극지 창작 레지던시에만 참여하는 것이 안타까웠는데, 이번에 극지연구소와 잘 협력이 되어 이 프로그램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한다.

통섭이 시대의 화두가 된 시대에서 예술과 과학의 만남은 이미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극지 환경을 다룬 극지과학을 소재로 다룬 시도는 국내에서 아직까지는 흔치 않다. 영화 <남극일기> 정도가 본격적인 극지 환경을 다룬 작품으로 회자된 적이 있다. 이는 예술가들도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극지에 대한 정보가 충분치 않은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이번 아카데미는 극지연구소 소속의 연구원들이 직접 나서 극지에 관한 기본적인 상식과 예술적 가능성이 있는 부분들을 설명해주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첫날 극지기후연구부의 강성호 책임연구원은 '북극과 남극의 사정'이라는 주제로 극지연구소의 활동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소개했다. 이날은 노진아 설치미술가도 함께 강단에 올라 자신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과학과 접목시킨 예술의 사례들을 전달했다.

기후변화 문제, 예술가의 소임이기도

영화 <트모로우>
두 번째 강연에 나선 김성중 극지기후연구부장은 '빙하가 녹는다'를 주제로 극지의 환경 오염과 지구 온난화 문제를 오랫동안 설명했다. 이날도 강연은 예술과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현재의 지구 온난화를 초래한 요인 중 하나가 인류 문명이라는 점은 예술가의 사회 참여의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지구는 곳곳에서 이상 기후 현상을 겪고 있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이례적인 강추위와 폭설은 많은 전문가들에게 빙하기의 도래를 예상하게 한다.

이날 김성중 극지기후연구부장도 "우리가 지금 온실가스 등을 배출하면서 기후변화를 초래하고 있고, 이 때문에 빙하기를 늦추고 있다"고 말하면서 "하지만 그게 결코 좋은 게 아니다. 장기적으로는 지구의 미래가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빙하의 크기는 해마다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고 이는 필연적으로 급격한 기후변화를 초래한다는 설명이다.

영화 <투모로우>는 이런 기후변화의 위험을 현실가능한 상황으로 그려낸 재난영화로 평가받는다. 기후변화는 최소 수십 년, 길게는 수만 년 동안 더디게 진행되기 때문에 그동안 재난영화의 소재로 삼기에는 부적합했다.

하지만 <투모로우>는 오랜 기간 동안 쌓인 기후변화의 결과들이 어느 날 지진이나 쓰나미, 화산 폭발 같은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는 과학적 가능성을 영화에 끌어들였고, 이후 현실에서도 이와 유사한 상황들이 일어나면서 의미 있는 텍스트로 평가받고 있다.

만화 <설국열차>
빙하기는 이제까지 애니메이션 <아이스 에이지>처럼 주로 판타지로서만 다루어졌다. 그러나 같은 작품은 빙하와 기후변화의 문제를 '지금 당장'의 문제라고 말하며 현실적인 각성을 촉구하기도 한다. 이것은 결국 환경을 파괴하는 일상에 익숙해진 인류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데 있어서 예술적 시도는 꾸준히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이런 시사적인 테마만이 극지 환경에서 다룰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니다. '박찬욱 제작-봉준호 연출'로 추진되고 있는 <설국열차> 역시 빙하기에 접어든 지구를 상상력으로 그려내 기대를 모으고 있다.

생물자원 동결보존 기술을 개발 중인 극지연구소의 김학준 박사는 냉동인간 부활을 연구하기 시작해 한국판 <데몰리션 맨>의 가능성을 점치게 하고 있다.

이번 프로그램의 마지막 강연일인 20일에는 이종익 극지연구소 책임연구원이 '태양계의 비밀, 남극운석'을 주제로 남극의 만년빙에 묻혀 있는 운석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는다.

오광수 ARKO 위원장은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극지 환경에서 새로운 영감과 상상력을 얻어 새로운 차원의 작품을 만드는 데 이번 프로그램이 초석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