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무용단 신작 통해 장르 대중화, 국립단체 정체성 확립 해법 모색

정적 속에서 객석을 향해 일렬로 선 무용수들. 사비에르 쿠가트의 '마리아 엘레나(Maria Elena)'가 흘러나오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천천히 몸을 흔들기 시작한다.

이들의 몸짓이 맘보춤에서 막춤으로 변하는 동안, 가운데의 한 사람만은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다. 잠시 후 음악이 멈추고 좌우의 다른 무용수들이 퇴장하자 이윽고 그는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태극권 같기도 하고 슬로우 팝핀 같기도 한, 이 무겁고 기괴한 움직임은 합세한 다른 남자 무용수들과 함께 금세 무대를 채운다.

경쾌하고 인상적인 도입부로 시선을 끄는 이 작품은 국립현대무용단의 신작 <수상한 파라다이스>다. 국립현대무용단은 올해 초 창단공연 <블랙박스>를 선보였지만 홍승엽 예술감독의 기존작들을 재구성한 형태였기 때문에 신작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그런 점에서 이번 작품은 국립현대무용단의 향후 정체성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로 주목받고 있다.

'DMZ'라는 업보의 흔적

국립무용단이나 국립발레단과 마찬가지로 국립현대무용단은 장르의 대중화를 목표로 하면서도 국립단체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한다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다. 대중에게 가장 낯선 현대무용이라는 장르를 친숙하게 이해시키는 작업도 만만치 않지만, '국립'이라는 관제 시스템이 주는 부담도 못지않다.

홍승엽 예술감독은 이번 첫 신작에서 'DMZ'라는 공감적인 소재를 택하면서 이 두 가지 난제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최근 'DMZ'를 소재로 한 다른 장르의 공연들처럼 <수상한 파라다이스> 역시 정치적인 맥락과 함께 자연 환경을 조명한다. 작은 이익 때문에 스스로 고통을 자초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비판도 흡사해 보인다.

하지만 이 작품의 중심적인 키워드는 '업보(Karma)'다. "우리 민족이 이런 희생을 치러야 하는 이유가 결국 민족의 업보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홍 예술감독의 설명이다.

그가 바라보는 DMZ는 모순적인 공간이다. 겉으로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지만 과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싸우다 죽어간 파괴의 공간이기 때문. 그래서 이 작품은 그런 민족의 업보의 흔적을 추적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작품은 크게 7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진혼', '불편한 조화', '전쟁', '연민' 등 DMZ로부터 파생된 심상들이 그대로 각 장의 테마가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언뜻 뻔해 보이지만 그런 전형성을 극복하는 것이 바로 '업보'의 묵직한 힘이다.

아이디어로 극복한 과제들

창단 후 첫 신작, 국립단체로서의 정체성 확립, 전형적인 주제, 현대무용에 대한 대중의 인식 등 여러 가지 난관을 노련하게 돌파하는 것은 홍 예술감독의 독특한 아이디어다.

분필로 바닥에 미스터리한 기호를 그리는 퍼포먼스는 이들이 무엇을 기록하는가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보이지 않는 업보의 무게감은 무용수들이 다른 무용수의 몸을 누르거나 발로 밟고 올라서는 동작으로 표현된다. 다른 무용수를 짊어지고 끝없이 원을 그리며 도는 동작은 쉽게 풀어낼 수 없는 업보의 질긴 굴레를 절묘하게 그려낸 대목이다.

구름, 사슴, 토끼, 새, 귀뚜라미 등을 형상화하는 몸짓은 낙원에 가까운 DMZ의 모습을 위태롭게 그린다. 한 무용수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다른 무용수들이 미리 준비한 흰 판자로 연이어 대주는 장면은 오랜 시간에 걸쳐 호흡을 맞춘 무용수들의 노력을 느끼게 한다.

음악의 활용도 인상적이다. 작품을 열고 닫는 사비에르 쿠가트를 비롯해 바흐, 헨릭 고레츠키, 아르보 패르트 등의 음악은 각 장에서 무용수의 몸짓이나 상황과 맞물려 흥미롭게 작품을 전개시킨다. 뿐만 아니라 포화 소리와 사이렌, 비행기 소음 등이 합쳐져 완성된 난리법석은 그야말로 '전쟁'이라는 제목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술감독의 안무 세계가 곧 무용단의 색깔을 좌우하는 장르의 특성 때문에 한동안 잡음을 겪었던 국립현대무용단은 이번 신작을 통해 그간의 오해를 불식시킬 것으로 보고 있다. 홍승엽 예술감독의 고유한 색채와 더불어 국립단체로서의 정체성이 고려된 첫 번째 작품 <수상한 파라다이스>는 8월 5일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공개된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