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홀, 대합실, 귀빈실 등 원형 그대로 복원 문화공간으로개관 프로젝트 미술 전시, 영화, 강의 등 마련

새로운 시대는 철도를 따라 왔다. 기적 소리가 근대를 깨웠다. 기차는 물자를 실어 날랐고 인력을 재배치했다. 역 주변에는 시장이 생겼고, 기회와 기대로 북적였다. 최초의 영화는 기차의 힘찬 움직임을 담았고, 사람들은 그 위용과 빠른 속도에 매료됐다. 국가와 자본은 철도와 함께 세력을 넓혔다.

기차역은 상징적인 교통의 중심지다. 다른 어떤 교통수단도 기차의 역사적 의미를 대체할 수는 없다. 건축가들은 시대의 꿈을 담아 건물을 지었다. 인류의 앞날에 번영만 있을 줄 알았던 근대의 몽상은 기차역을 낭만적인 랜드마크로 만들었다.

옛 기차역을 되살리는 것은 이 모든 문화적 지층을 되돌아보는 일이다. 구 서울역을 복원해 지난 8월 9일 개관한 문화공간 '문화역서울284' 역시 사회상을 반영해온 공간으로 서울역을 재조명하며 문을 열었다.

1925년 경성역으로 출발해 한국 근대화의 한 축을 담당했던 구 서울역은 2004년 KTX 개통과 함께 신역사가 들어서면서 기능을 상실했다. 그 후 구 서울역의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는 방안이 논의되었고, 1925년 준공 당시의 모습을 복원하고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기로 결정됐다.

그 결과 중앙홀과 1,2등 대합실, 귀빈실 등 건축적으로 의미 있는 공간이 원형 그대로 복원되었고, 공사 과정을 보여주는 전시실이 만들어졌다. 천장이 높고 널찍한 방과 복도들은 미술 전시와 공연, 컨퍼런스, 연구 등 다양한 행사들로 채워질 예정이다. 문화역서울284라는 이름에는 사적 284호라는 의의가 담겨 있다.

지난 8월 9일 열린 문화역서울284 개관식
개관 프로젝트인 <카운트다운>은 문화역서울284의 지향점을 잘 드러낸다. 미술 전시와 공연, 영화 상영과 건축디자인 강의가 마련되어 관객들을 맞는다. 회고적 작업보다는 젊고 미래지향적인 작업들이 선보여 구 서울역에 대한 공동의 기억을 새롭게 만들어갈 예정이다.

개관식 때는 서울사운드아카이브프로젝트(SSAP: Seoul Sound Archive Project)의 '사운드 프로젝트: 세 겹의 현재'가 중앙홀을 가득 메웠다. 구 서울역의 시간을 지금과 떠나기 전, 도착할 곳의 시간들로 나눈 후 각각을 소리로 표현한 작품. 주변의 일상적 소리와 악기의 소리, 퍼포머들의 움직임과 기차 영상이 어우러져 설레면서도 애잔한 기차역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무용가 안은미는 23명의 퍼포머와 함께 구 서울역사의 과거를 추억하고 위로하는 퍼포먼스 '가슴걸레-메이드 인 서울역'을 벌였다. 걸레 역할을 맡은 퍼포머들이 건물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불온한 흔적을 닦아낸다는 콘셉트의 현대판 씻김굿이다.

미술 작가들은 공간의 특성과 맞물리는 작품들을 설치했다. 중앙홀 입구에 걸려 있는 이불 작가의 'The Secret Sharer'는 개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크리스털을 통해 죽음이 새로운 탄생, 영원함으로 전환되는 것을 형상화하고 있다. 작가 자신의 개의 말년을 기리기 위해 제작한 작품에 구 서울역의 부활이라는 의미가 덧붙여졌다.

잭슨홍 작가는 기차 승객석을 본뜬 4인용 의자 10개를 만들었다. 구 서울역을 위한 기념비이자 관객을 위한 휴식공간인 이 작품은 관객의 참여를 통해 다르게 배치되는 유연함과 개방성도 갖추고 있다.

준공 당시 모습으로 복원된 구 서울역의 중앙홀
우순옥 작가는 귀빈실의 화려한 인테리어 속에 '우리는 모두 여행자'라는 문구를 새겨 넣었다. 중앙에 있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과 옛 풍경, 그리고 인생에 대한 시적 표현이 함께 비치는 것을 보면서 관객은 잠시나마 다양한 시간의 공존을 경험할 수 있다.

양수인 작가의 '있잖아요,'는 집회 장소로서의 서울역 광장의 의미에 주목한 작품. 관객은 광장에 설치된 이 부스에 들어가 10초 동안 자유 발언을 할 수 있고, 그 내용은 스피커를 통해 바깥으로 울려 퍼진다.

서울역이 언급된 유행가를 찾아 테이프에 녹음한 음악가 볼빨간과 미술가 Sasa[44]의 '서울역', KTX, 새마을호, 무궁화호 기관실의 소리, 한강 철교의 소리, 매표소 소리, 상황실 직원들의 교신 소리 등을 바탕으로 관객들이 디제잉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든 SSAP의 '서울역 소리보관 프로젝트'는 귀로 듣는 서울역 풍경이다.

<카운트다운>은 인디 밴드 공연, '복원'과 '도시', '시간'을 주제로 하는 영화 상영, 건축의 역할에 대한 강연, 서울스퀘어 미디어캔버스를 통한 영상 상영 등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되며 내년 2월 11일까지 이어진다.


구 서울역 복원 과정을 보여주는 복원 전시실
문화역서울284 개관 프로젝트 <카운트다운> 중 이불 작가의 'The Secret Sharer'
문화역서울 284 개관 프로젝트 <카운트다운> 중 우순옥 작가의 '대합실'
문화역서울284 개관 프로젝트 <카운트다운> 중 잭슨홍 작가의 '승객석'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