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 '개혁'업은 소액주주들 '재벌과의 전쟁'

주총의 계절 "재벌을 심판하마"
새 정부 '개혁'업은 소액주주들 '재벌과의 전쟁'

손에 들고 있던 주식 21주가 한순간에 단 1주로 변하는 상황에서 소액 주주들의 몸부림은 처절했다. 그간 누적된 불만과 분노는 일시에 폭발했다.

하이니닉스반도체 제 55기 정기 주주총회가 열린 2월25일 경기 이천본사 아미분화센터. 주총 시작 1시간전인 오전 9시부터 '하이닉스 살리기 국민운동협의회'소속 소액 주주들이 주총장을 메우기 지작했다. '죽어가는 소액주주 살려내라' '대북송금 5억 달러는 주주들의 피눈물' '협잡군 채권단은 각성하라'…. 주총장 안팎에는 21대 1의 감자(자본금 감소)안에 반대하고 대북송금 의혹 규명을 촉구하는 내용의 피켓이 물결을 이뤘다.


아수라장 된 하이닉스 주총장

우의제 사장이 주총 시작을 선언하면서부터는 격렬한 몸싸움으로 이어졌다. 소액 주주들은 단상을 행해 소지품과 계란 등을 투척하며 회의 진행을 방해했고, 이 과정에서 앞 좌석에 앉아있던 주주 1명이 머리를 다쳐 병원으로 후송되기도 했다. 사측은 100여명의 사설 경비요원을 동원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소액주주들은 진압 요원의 철수를 요구하며 입에 담긴 힘든 욕설과 괴성을 퍼부었고, 우 사장은 일부 주주에게 퇴장 명령을 내리는 등 사태는 일촉즉발의 험악한 상황으로 이어졌다.

가까스로 사태가 수습된 것은 주총 시작 2시간쯤 지났을 무렵, 감자안 처리를 앞두고 300여명의 소액 주주들이 한꺼번에 단상 앞으로 몰려들 움직임을 보이자 우 시장이 이사보수한도 승인과 감자건을 동시에 상정하고 "주주 67%의 동의로 두 가지 안건을 모두 통과시킨다"며 기급적으로 망치를 두드렷다. 대여섯명의 경호원에 둘러싸인 우 사장은 서둘러 주총장을 빠져나갔다.

예견된 전쟁, 뻔한 결과에 소액 주주들이 물러날 리 없었다. '하이닉스 살리기 국민운동협의회' 오필근 으장은 주총이 끝난 직후 "감자안 의결이 날치기로 이뤄진 것인 만큼 수송 준비에 착수하겠다. 또 LG와의 빅딜에서부터 시작해 주가 폭락, 해외 매각 문제, 주가 조작 사건, 1억달러 증발 등 하이닉스를 둘러싼 각종 의혹을 다루는 청문회를 개최할 것을 국회와 각 정당에 요구하겠다"고 심지어 한 소액주주는 감자 결정에 불만을 품고 이날 오후 112로 저활르 걸어 "오후 4시에 채권은행 2곳의 본점을 폭파하겠다"고 협박하는 등 극단으로 치닫기고 했다.


1개월 주총 레이스 시작

2월13일 경남 양산에서 주주총회를 개최한 넥센타이어를 시작으로 12월 결산거래소 상정법인 및 코스닥 등록기업의 정기 주총 시즌이 개막됐다. 3월말까지 주총을 열어야 하는 상장·등록 기업은 모두 1,345개사. 올 주총이 예년에 비해 특히 주목되는 것은 '재벌 개혁'을 기치로 내건 노무현 정부의 등장이 몰고 올 변화 때문이다.

감자라는 특수 상황에 맞닫뜨려 폭력 사태까지 이어진 하이닉스 주총이야 논외로 친다 해도, 대부분 기업 주총에서 '마이너'들의 목소리를 중시하는 새 정부의 등에 업은 소액 주주들의 입김은 한 층 더 강해질 전망이다.

인터넷을 통해 자발적으로 결집된 소액주주 모임은 치밀한 사전 모의를 통해 주총에서 막강한 권리를 행사하겠다고 벼르고, 참여연대 등 시민 단체들은 한 층 더 강해진 파워를 바탕으로 이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겠다고 나섰다. 1개월간의 주총 레이스는 기업들에게는 한 바탕 치러야 할 전쟁인 셈이다.


"내손으로 재벌 바꾸겠다"

올 주총에서는 주요 재벌들의 세습 경영과 불투명한 지배 구조가 최대 현안이 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검찰이 SK, 한화 등 주요 재벌에 '메스'를 들이대는 등 새 정부의 주변환경은 "내 손으로 재벌을 바꿔보겠다"는 소액 주주들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다. 특히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2~3곳의 기업을 집중 타깃으로 삼겠다고 벼르고 있는 터. 기업들은 "자칫 잘못 걸려들 경우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다"며 전전긍긍하고 있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이수정 간사는 "지난해에는 외환은행과 현대중공업 주총에 주력했지만 올해는 여러 가지 고려 사황이 많아 아직 방침을 정하지 못했다"며 "최근 검찰 수사가 재벌의 부당 세습드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만큼 이를 더욱 촉구하는 효과를 낼 수 있는 기업이 타깃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SK그룹 계열사들의 주총은 사측과 소액 주주들 간 일대 격전장이 될 가능성이 짙다.그룹측은 지주회사 격인 SK(주)를 비롯해 SK텔레콤과 SK글로벌, SKC, SK케미칼 등 주요 계열사 주총을 3월 14일동시에 개최하는 '소나기 주총'으로 방패막을 쳤다. 1~2곳 계열사가 주총이 쑥대밭으로 변하는 것은 막아보자는 계산에서다. 대부분 계열사의 주총 안건은 지난해 결산 보고와 임기 만료된 이사들의 선임, 이사 보수 한도 승인 등 일반적인 것들.

하지만 경영진의 배임과 분식 회계 혐의 등 검찰 수사가 이뤄지고 있는 사안에 대한 주주들의 공세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대규모 투자 계획 방침을 고수했다가 유례없는 주가 폭락 사태를 맞은 SK텔레콤 역시 이번 주총 만큼은 잔뜩 몸을 사려야 하는 형편이다.

그룹 관계자는 "최태원 회장 구속에 이어 손길승 그룹 회장까지 검찰에 소환되는 마당에 주총 공세까지 이어질 경우 그룹 전체 분위기가 초토화하지 않겠느냐"며 참담한 심정을 드러냈다.

이런저런 이유로 시민단체의 감시 대상에 오른 LG, 한화, 두산, 현대차, 현대 중공업 등 다른 재벌들도 올 주총을 단순한 '통과 의례'로만 여기기에는 힘든 처지다. 3월 1일 통합 지주회사 체제를 출범시킨 LG는 구씨와 허씨 집안 지분 정리 문제, 현대차는 정몽구 회장의 장남인 정의선 부사장의 초고속 승진 문제, 현대중공업은 정몽준 의원의 대선출마와 2000년 사업보고서 및 가결산 재무제표 문재 등을 둘러싼 공세에 휩싸일 것으로 예상된다.


쥐꼬리 배당도 성토대상

해마다 주총에서 거론되는 단골 메뉴인 '쥐꼬리 배당' 문제도 여느 때보다 집중 성토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증권거래소가 12월 결산 상장 기업 중 배당에 관한 사항을 공시한 76개사를 조사한 결과 이들의 총 배당금 규모는 2조9,766억원. 단순히 수치상으로만 보면 전년보다 75.6%나 증가했다.

하지만 소액 주주들 대다수는 상당수 기업들이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낸 데 비하면 배당금이 많지 않다고 맞서며 이번 주총에서 만큼은 '본 때'를 보여주겠다고 벼른다. 지난해 12월 배당기준일(26일)에 681.89였던 종합주가지수는 2우러28일 575.43ㅇ르 기록, 무려 100포인트 가까이 급락해 투자자들의 보상 심리도 훨씬 커졌다.

특히 실적을 이유로 일부 기업이 지난해 임직원들에게 파격적인 특별 성과급을 지급한 것도 소액주주들의 볼 멘 소리를 자극하고 있다.

비록 별 다른 사태는 없었지만, 2월 28일 오전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삼성 전자 추종에서도 소액 주주들의 '배당불만'이 봇물을 이뤘다. "지난해 주식 매입 평균 단가가 34만4,500원이었지만 배당금 결정 종가는 33만원에 불과했다.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수익을 올렸다면서 불과 5,500원을 배당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 한 소액 주주는 아예 메가폰까지 준비해 열변을 토했다.

또 다른 소액 주주는 "임직원들에게 무려 3,720만원의 특별 상여금을 지급한 회사가 주주 배당금은 8,000억원만 주는 것은 명백한 모럴 해저드"라며 "회사의 주인을 홀대하고 종업원만 배를 불려도 되는 것이냐"고 따졌다.

같은 날 LGGI주총세서도 일부 소액 주주들은 보통주 기준 4%에 그친 배당률과 LGEI와의 합병에 따른 매수 청구액이 무려 3,044억원에 달한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주총장 밖에서도 소액주주 맹위

소액 주주들은 주총장 밖에서도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소액 주주의 요구에 따라 기업 경영에 관한 주요 결정 사항이 바뀌는 사례가 비일비재한 것은 이들 단적으로 보여준다. 대표적인 사례가 정수기 업체인 웅진코웨이. 웅진그룹은 2월 초 아비씨엔아이사와 쌍용화재 인수를 위한 양해각서를 맺고 보험업에 뛰어들겠다고 선언했다.

웅진코웨이와 웅진코웨이개발, 윤석금 회장이 일정 비율로 나눠 지분을 인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1주일 뒤 웅진코웨이측은 쌍용화재 인수를 위한 지분 참여를 전격 철회했다. 소액 주주들이 "사업 다각화로 위험이 높아질 수 밖에 없다"며 저극 반대하고 나선 결과였다.

풀무원의 경우도 비슷하다. 회사측은 지난 1월 10개 부문을 자회사로 분할하고 사업 지주회사를 설립하는 내용의 사업계획을 발표했지만, "분할 효과가 불확실하다"는 주주들의 빗발친 항의에 결국 결정을 보류했다. 골프용품업체에 대한 출자를 결의했다가 철회한 코스닥 등록업체 화인썬트로닉스, 유통 주식 수를 늘려야 한다는 주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상반기 중 무상증자 여부를 결정키로 한 네요위즈 등도 막강해진 소액주주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기관도 권리 찾기 가세

그간 기업 경영에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던 기관 투자자들이 주주 권리 찾기에 동참하기 시작한 것도 올 주총에 새로운 변화중 하나다. 삼성투자신탁운용은 2월 25일 하이닉스 주총에서 안건으로 올라온 21대 1 감자안에 소액주주들과 함께 반대 의견을 개진해 주목을 받았다.

3월16일 예정된 한국전력 주총에서는 기관 투자자들이 공동 대응을 통해 위력을 과시할 예정이다. 한국, 대한, 현대, 삼성투신 등 투신사들은 민간 주주들에게 우선 배당하라는 요구를 한전측이 거부하자 연대를 통해 주총에서 재무제표 승인 등의 안건에 반대표를 던질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경제정의실천연합 고계현 정책실장은 "최근의 움직임은 시대 변화에 발 맞춰 경영진과 대주주, 기관 투자가, 소액 주주등의 역할 설정이 정상화하느 과정"이라며 "소액 주주들의 권리 신장은 장기적으로 기업의 이익으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이제는 기업들의 마인드 변화가 뒤따라야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입력시간 : 2003-10-01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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