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속 세계 정세와 맞물려 악재로…

[SK 쇼크] "셀 코리아" …제2의 IMF 전주곡?
위기속 세계 정세와 맞물려 악재로…

'시장의 복수'는 가혹했다. 북핵문제, 이라크 전쟁 등 외부요인에 '한국의 엔론 사태'로 불리는 SK 분식회계 사태의 기름이 뿌려지면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시장의 분노는 폭발했다. 복수는 단순히 SK에 그치지 않고, 한국 경제 전반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자행됐다.

주가는 폭락했고, 환율과 금리는 폭등하는 전형적인 '트리플 약세'국면이 연출됐다. 무엇보다 투신권의 대규모 환매 사태는 대우, 현대 사태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끔찍했던 '1997년의 악몽'에 대한 경고가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정부는 '탱크'를 동원해 시장을 진압했다. 성공적이었다. 우연이었을까.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미 대통령의 전화회담에서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입장이 발표됐다.

또 미국이 이라크 군부를 대상으로 투항 협상을 진행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진 것도 힘을 보탰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일단 진압은 됐지만 시자의 복수가 한국 경제 전반에 대해 이뤄졌고, 그 강도도 엄청났다는 점이다. SK사태는 촉매제였을 뿐, 한국 경제에 대한 시장의 불신이 그 동안 얼마나 차곡차차곡 싸여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펀더멘털 자체에는 아무 변화도 없는 상황에서 강제적인 진압의 효과는 그리 오래 갈 수없다. 시장은 언제든 다시 폭발하기 위해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을지 모른다. 한국 경제는 혹독한 꽃샘 추위를 겪고 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걸까, 아니면 이제 막 길고 긴 겨울의 문턱에 들어 선 것일까.


SK파장, 금융시장 강타

SK글로벌의 1조5,000여억원 분식회계 사건에 대한 검찰수사가 공식발표된 다음날인 3월12일. 오전부터 투신사 창구에는 SK글로벌 회사채가 포함된 채권형 펀드에 대한 고객들의 환매요청이 폭주했다. 전날 1조7,000억원이 빠져 나간 데 이어 이날에는 일반 펀드로까지 환매가 몰려 하루에만 5조원의 자금이 이탈했다. 이후 이틀 동안에도 각각 4조원, 3조1,000억원 어치의 환매가 이뤄지는 등 SK 사태 이후 4일간 환매 총액은 14조원에 육박했다.

투신사들은 환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채와 회사채를 대거 시장에 내다 팔았고, 이 영향으로 채권 값이 떨어지면서 금리가 급등했다.

전날 4.89%였던 3년짜리 국고채 수익률(금리)은 12일 5.20%로 하루만에 무려 0.51%포인트가 뛰었다. 외환 위기 당시였던 98년3월31일 2.45%포인트 이후 하루 상승 폭으로 5년만에 최대치였다.

"원화보다는 안전한 달러를 사자"는 세력들이 몰려 들면서 원화 가치도 큰 폭으로 하락해 전날 1,299.9원이었던 원·달러 환율은1,245.0원까지 치솟았다. 막판 프로그램 매수가 몰려 전날보다 소폭 하락하는데 그친 주가(종합주가지수 531.81)가 그나마 다행이었다.

해외 채권단 일부에서 만기가 돌아온 SK글로벌의 대출금 상환을 공식 요구하고 나선 것도 위기감을 증폭시켰다. 프랑스의 소시에떼 제너럴과 크레디과 레디 리요네, 중국의 공상 은행 등 7~8곳의 해외채권 금융기관은 만기 도래하는 채권의 연장을 거부하며 상환을 요구했다.

SK글로벌의 해외부채는 순수하게 해외 금융 기간에서 빌린 1조3,000억원 등 총2조4,000억원. 해외 채권이 상환압박에 시달릴 경우, 5조8,000억원에 달하는 채권을 보유하고 있는 국내 금융기관들도 자유로울 수 없음은 물론이다.

'해외채권 만기 연장 거부 →해외채권 디폴트 →해당회사 법정관리 →국내 금융기관 타격 →국내 금융시장 불안 증폭'의 악순환은 그간수차 목격한 수순이었다.


정부, 전방위 조치로 진압성공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 직면한 금융 당국과 채권단의 대응은 모처럼 합격점이었다고 평할 만한다. 전방위적이었고, 또 신속했다.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외한 위기 이후 대기업 유동성 위기 사태를 누차 겪은 정부와 채권단이 경험적 학습을 토대로 깨우친 노하우를 적절히 발휘한 것 같았다" 고 평했다.

한국은행은 환매조건부채권(RP) 인수 형식으로 투신권에 1조2,000억원을 긴급 지원한데 이어 17일에는 국채와 통화안정증권채권 2조원 어치를 입찰 형태로 채권 시장에서 직접 매입했다.

한은의 국·공채 매입이 1997년 외환 위기, 99년대우 사태, 2001년 賻?이상 급등 사태 등 지금까지 불과 3차례 밖에 없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번 사태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재정경제부는 외환시장에 직적 달러를 공급해 환율 방어에 나섰고, 금융감독위원회도 SK글로벌 채권이 편입된 펀드에 대해 기관들에게 환매 자체를 요청했다. 금감위 김석동 감독정채 1국장은 "막연한 불안감때문에 환매가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며 "협회를 중심으로 금융권에 환매를 자제토록 하고 연·기금에 대해서도 환매 자제를 요청했다"고 말했다.

금감위는 또 대외 협상팀을 구성해 SK글로벌 만기 상환을 요구하는 해외채권단에게는 상환 유예 및 만기 연장을 요구키로 했다.

세계적 신용평가기관 무디스가 13일 한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현 수준으로 유지하겠다고 발효한 것도 사실 정부의 공이었다. 무디스는 1개월 전인 2월 중순 우리나라 신용등급 전망을 'A3 긍정적(Positive)'에서 'A3 부정적(negative)'으로 2단계나 낮춰 조만간 신용등급 자체가 강등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던 터였다.

재경부 관계자는 "SK사태 영향으로 금융시장이 요동을 거듭하는 상황에서 무디스가 국가 신용등급을 낮췄을 경우 사태를 걷잡을수 없었을 것"이라며 "수일간 밤잠을 설쳐가며 한반도에 전쟁 가능성이 전혀 없으며 국가 경제의 펀더멘털 자체는 안정적이라는 점을 설펴한 것이 주효했다"고 말했다.


찻잔속 태풍

금융시장은 일단 외형의 평온을 되찾았다. "지금이 주식 투자 적기가 아니냐"는 '개미'들의 기대감이 고조되고 있고, 환율과 금리도 하향 안정세로 돌아섰다. '셀 코리아'바람과 함께 무차별적 투매 현상이 연출되는 바람에 한때 2%대에 육박했던 외국환 평형 기금 채권(외평채) 가산금리도 주말을 고비로 조금씩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SK사태가 전화위복의 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국내 기업의 기업지배구조와 회계 불투명성을 개선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를 할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사정이 그리 놀록치는 않다. "SK 사태는 한국이 현재 당면하고 있는 몇가지 현안 중 하나일 뿐이며, 북핵위기, 소비 및 투자심리 위축, 세계 경제 둔화, 이라크 위기에 따른 유가 상승등 대내외 요인이 맞물려 한국의 자본시장은 조기 회복이 어려울 것이다"(아시안 월스트리트저널). "이라크전 정기화의 경우 한국과 태국, 대만 등 아시아국가 절반이 경기 후퇴 속에서도 높은 인플레이션이 나타나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질 수 있다"(이코노미스트 그룹).

"유가 상승으로 인한 경상 수지 악화 및 수출 증가율 둔화, 해외 자금 유입감소, 북핵 문제를 둘러싼 지정학적 긴장 등을 이유로 원·달러 환율 3개월 전망치를 1,200원에서 1,325원으로 상향 조정한다"(골드먼삭스). 금융시장 진정 이후에 쏟아진 해외 보고서 어느 곳에서도 낙관적인 전망을 찾기는 힘들다. 국내 전문가들도 "외환위기 당시와 비슷한 정도는 아니지만 상당히 어려운 상황임은 분명하다"고 입을 모은다.

현재 한국 경제를 짓누르고 있는 가장 큰 짐은 가계 대출 부실이다. 건실한 기업은 은행 돈을 쓰지 않고, 가계만 돈을 빌려다 쓰면서 빚어진 400조원에 달하는 공룡 가계 부채는 쉽게 해소하기 힘든 골칫거리다. 채권 시장에서 카드채가 애물 단지 취약하게 만들고 있는것도 올 들어 계속되고 있는 신용카드 연체율 상승 탓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동산 가격마저 폭락할 경우 90년대 일본의 경험처럼 금융 부문의 부실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한국경제, 다시 위기 맞나

SK사태로 불거진 기업의 회계 불투명성도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SK글로벌 뿐 아니라 많은 한국기업이 분식회계를 했을 거라는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한 외국계 펀드 관계자는 "SK 사태는 외환 위기 극복과정에서 한국 기업의 구조조정이 성공적이었다는 인식과 달리 여전히 불투명성이 남아있음을 보여준 사례"라며 "엔론 사태가 미국 경제 침체를 불러오는데 결정적 계기가 됐듯 SK 사태가 한국기업들에 대한 전반적 불신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97년의 외환위기가 외환보유액의 부족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분명 1,200억 달러가 넘는 외환을 보유한 현 상황은 분명 다르다.

정부 관계자는 "이 정도 의환보유고이면 어떤 상황이 와도 충분히 방어가 가능하다"고 자신하다. 하지만 당시보다 사정이 더 좋지 않은 부분도 분명히 있다. 외환위기때는 미국경제가 좋아 수출로 돌파구를 찾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미국과의 동반 침체는 아무런 돌파구없이 벼랑 끝 상황에 내몰릴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SK사태로 촉발된 시장의 복수는 바로 이러한 '만일의 사태'를 경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입력시간 : 2003-10-01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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