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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짱 혹은 장삿속… 역시 김정태
LG카드 벼랑 끝 회생
냉혹한 경제논리와 배수진으로 정부·LG 백기 들게 한 '파워 뱅커'


LG카드의 운명은 두 갈래였다. 위탁 관리를 통해 회생을 하든지, 아니면 청산의 수순을 밟든지. 법정관리나 구조조정촉진법 등의 대안은 애초 불가능했다.

신인도가 생명인 금융기관에게 법정관리는 사형 선고에 다름 없었고, 설사 우격다짐으로 밀어 붙인다 해도 법정관리에 가기까지 100일 가량의 시간을 버틸 힘은 없었다. 구촉법 역시 채권단의 75%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하지만 채권단의 지분은 턱없이 부족했다.

목숨을 담보로 한 싸움에서 대체로 승패는 배짱에서 나뉘어지기 마련이다. 정부와 LG는 어떻게 해서든 LG카드를 죽여서는 안 되는 절박함이 있었던 반면, 채권단은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LG카드가 청산된다 해도 어쩔 수 없다며 배수진을 쳤다. 그 중심에는 ‘반(反) 관치’의 기치를 내건 김정태 국민은행장이 있었다. 채권단의 완승은 김 행장의 두둑한 배짱, 혹은 냉혹한 장삿속의 승리였다.



9일 우리은행 본점에서 열린 LG카드 채권단회의.
사태의 '키'를 쥐고 있던 김정태 국민은행장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김동호 기자



정부-채권단의 엇갈린 표정

윤용로 금융감독원 감독정책2국장은 LG카드 사태가 가까스로 타결된 9일 밤 피곤한 기색으로 기자실을 찾았다. 정부측 김진표 부총리 겸 재경부장관, 그리고 이정재 금감위원장을 대신해 현장 중재역을 자처했던 그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벼랑 끝 상황에서 내린 최선의 결론이었다고 ‘양해’를 구하는 듯했다. 그는 “은행들로서는 청산이 당장은 손실을 줄이는 방법일지 모르지만, 경제 전체의 영향을 생각해야 하는 정부로서는 택할 수 없는 길이었다“며 “‘투신 환매 - 채권시장 붕괴- 2금융권 부실화 - 신용불량자 급증’으로 이어지는 부메랑 효과는 생각만해도 끔찍했다”고 했다.

수시간 전. 우리은행에서 열린 LG카드 16개 채권금융기관장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 김정태 행장은 의기양양했다. “국민은행의 요구가 모두 수용됐다”는 것이 그의 일성(一聲). 그는 “LG그룹이 3,750억원 추가 유동성 부담을 약속한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며 “미래의 추가적인 손실 부담만 지우지 않으면 된다”고 말해 LG카드 사태가 타결될 것임을 시사했다.

이날 채권단이 합의한 LG카드 정상화 방안 주요 내용은 이러했다. ‘16개 채권은행과 보험사가 출자 전환을 포함해 총 3조6,500억원의 지원을 하되 산업은행이 지분 25%를 확보해 단독 관리를 한다. 또 LG투자증권 매각 대금 3,500억원을 LG카드 경영 정상화에 투입하고 LG그룹은 8,000억원의 유동성을 지원한다. 만약 추가 부실이 발생하면 5,000억원 한도 내에서 산업은행이 25%, LG그룹이 75%를 부담한다’.

김정태의 완승

‘국내 매각’으로 가닥을 잡아 나가는 듯했던 LG카드 사태가 꼬이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12월 18일 회계법인의 실사 결과가 나오면서부터 였다. 자본잠식 규모가 당초 예상했던 1조8,000억원을 훨씬 넘는 3조2,000억원으로 나타난 것. 호시탐탐 LG카드를 노려오던 김승유 하나은행장, 이덕훈 우리은행장 등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매수 의견을 거둬 들였다. 12월 30일 입찰 마감일까지 단 한 곳도 입찰에 참가하지 않은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국면 반전을 위해 정부가 내민 새로운 카드는 ‘산업은행의 지분 확대’였다. 정부 내의 ‘꾀돌이’로 소문난 변양호 재경부 금융정책국장이 국회 동의가 필요한 공자금 투입 대신 산은 출자 확대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았고, 김 부총리가 이를 흔쾌히 수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방관자에 머물러 있던 김정태 행장이 전면에 나선 것은 이 때부터. 산은의 LG카드 출자 지분율을 자회사에 대한 지분법 평가시 손실 반영 부담이 없는 19% 이하로 가져가겠다는 정부의 방침에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이다. 김 행장은 산은 지분을 34% 이상으로 늘려 확실한 1대 주주가 돼야 한다고 버티기 작전에 나섰다. “ LG카드를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주인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50% 이상의 지분을 가져야 하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면 최소한 3분의 1 이상은 가져야 한다”는 논리였다.

추가 부실에 대한 책임도 확실한 선을 그었다. 채권단이 출자 전환에는 참여하겠지만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추가 부실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 “ LG카드를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가 돈을 조금 지원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의 책임은 절대 질 수 없다”는 의미였다. 산은 출자분을 19%에서 25%로 확대해 단독 관리를 하도록 하고, 추가 부실 책임을 산은과 LG가 나눠 지기로 하는 타협안은 그야말로 김 행장의 요구 사항이 대부분 수용된 결과였다.

시대가 만들어 준 영웅

김 행장의 입장에서 볼 때 그가 이번 사태를 통해 거둔 최대의 성과는 LG카드의 부담을 덜어냈다는 그 자체보다 자신의 존재를 다시 한번 만천하에 각인시켰다는 점이다. 실적 부진으로 임기(10월)를 앞두고 궁지에 몰려 있던 그로선 완전 민영화 이후 시장에 뭔가를 보여줄 수 있는 계기가 절실한 시점이었다. 그가 여느 때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전면에 나서며 특유의 ‘ 쇼맨십’을 발휘한 것도 결코 이와 무관치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그의 계산은 충분히 적중했다. 금융 시장에서는 “ 역시 김정태”, “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긍정적 평가가 빗발치고 있다. 과거처럼 정부가 금융기관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인ㆍ허가권과 행정력을 보유하고 있는 상황하에서 그가 아니라면 완강한 저항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특히 “ 시장이 관치를 제압했다”는 평가와 함께 그는 1등 공신 대접을 톡톡히 받고 있다. 시중은행 한 임원은 “ 정부안에 노골적으로 반발하지 않은 다른 은행들도 속으로는 김 행장을 적극 지지했을 것”이라며 “ 주주와 고객의 이익을 최우선시 해야 할 상업은행으로서 당연히 보여 줘야 할 모습이었다”고 평가했다.

뜻을 관철하지도 못했으면서 관치의 오명만 뒤집어 쓰게 된 정부 내에서는 그에 대한 불쾌감이 극에 달해 있다. “ 그런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김 부총리의 극도로 자제된 공식 언급이라면, 비공식적 자리에서 김 행장에 대한 정책 당국자들의 평가는 노골적이다. 아예 “ 옷을 벗기고야 말겠다”는 극한 표현까지 나올 정도다. 정부 뿐 아니라 시장 일각에서도 “ 리딩 뱅크 수장으로서의 책임은 방기한 채 금융 시장 혼란을 담보로 자행의 이익만 철저히 챙겼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번 사태가 더 이상 공공의 이익을 내세워 정부가 은행들에게 손실 부담을 강제하고 은행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이를 떠안는 시대는 지나갔다는 점을 일깨워줬다는 점. 고도의 상업적 계산이든, 두둑한 뱃심이든 시대가 김정태라는 영웅을 낳게 한 셈이다.

△ LG카드 향후 관건은 '새 주인 찾기가' 급선무

지난해 11월 21일 현금 서비스를 중단한 이후 정확히 50일 만에 LG카드 사태가 일단락됨으로써 한숨은 돌리게 됐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은 첩첩산중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추가 손실이 5,000억원을 넘어서는 경우다. 1년 내 발생하는 5,000억원 한도의 추가 부실에 대해서만 LG와 산은이 각각 75%와 25%씩 책임을 지기로 했을 뿐, 추가 발생분 처리에 대한 명확한 합의가 없었기 때문. 채권은행 한 관계자는 “ 정확한 실사가 없는 상황에서 추가 부실이 5,000억원을 넘어설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며 “ 추후 손실에 대한 안전장치가 확실하지 않다면 언제든 유동성 위기가 재발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미 고객들의 신뢰를 잃은 상황에서 고객 이탈 규모도 관건이다. 혹시 결제가 되지 않아 돈을 떼일 수도 있다는 카드 가맹점들의 우려가 남아있는 한 결제 기피에 따른 상당수 고객의 이탈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정확한 규모를 추산할 수는 없지만 유동성 위기 발생 이후 이미 상당수 LG카드 우량 고객이 등을 돌린 것으로 알려진다.

전문가들은 결국 하루 빨리 산은의 위탁 경영을 마무리하고 새 주인을 찾는 것이 급선무라고 입을 모은다. 대규모 구조조정 등 경영 정상화를 거쳐 6~7개월 내 매각 작업을 완료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복안이지만, 원매자가 쉽게 나타나지 않을 경우 다시 한번 소용돌이에 휘말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입력시간 : 2004-01-16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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