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체제 강화, 실적위주 승진인사로 40대 임원시대 본격화

재계 인사 "믿을건 피붙이 뿐?"
친정체제 강화, 실적위주 승진인사로 40대 임원시대 본격화

갑신년 대기업 임원 인사의 키워드는 ‘신뢰(Trust)’였다. 기업 오너가 신뢰할 수 있는 확실한 버팀목으로, 또 실적으로 승부하는 인재가 중용되고, 변화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 젊은 사고의 보유 여부에 인사의 기준이 얹혔다.

삼성과 LG, 현대ㆍ기아차 그룹 등이 설 연휴 직전까지 신년 임원인사를 단행, SK, 한화 등을 제외한 주요 그룹의 정기 인사가 막을 내렸다. 이번 재계 인사는 예년과는 차별화한 면면을 보여줬다는 게 대체적인 평이다. 우선 오너의 친ㆍ인척을 전진 배치하거나 구조조정본부 출신을 중용하는 등 오너중심의 친정체제를 강화한 점이 눈에 띈다. 이는 지난해 재계가 경영권 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오너의 리스크가 커지면서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자기 사람’의 필요성이 발등의 불이 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번 인사에서는 또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됐다. 그것은 ‘실적 있는 곳에 승진 있다’는 결과로 나타났고, 40대 사장 및 임원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이공계 출신과 해외파의 중용도 눈길을 끄는 부분이다.

삼성 이건희(왼쪽) 회장 등 전경련 회장단이 1월 19일 노무현 대통령과의 오찬에 앞서 얘기를 하고 있다. 오대근 기자

굳건해진 오너일가 직할체제

지난해 SK와 현대그룹의 경영권 분쟁을 지켜본 기업들은 친ㆍ인척이나 측근들의 중용을 통해 재벌 총수나 오너 일가의 직할체제를 보다 공고히 했다. 이는 기업지배구조 개선이나 ‘소유와 경영의 분리’라는 시대적 변화의 바람과는 상반된 것이어서 부작용을 우려하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삼성의 경우 대선 비자금 ‘후 폭풍’의 우려 속에서도 과감한 발탁인사를 실시, ‘역시 삼성은 다르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이 회장의 측근에서 거대 공룡인 삼성조직을 이끌어온 구조조정본부 이학수 사장을 부회장으로 승진시키고 김인주 부사장(재무팀장)을 사장으로 고속 승진시키는 등 구조본 출신을 중용했다. 삼성은 특히 구조본에 실ㆍ차장제를 부활시키는 등 구조본 기능을 크게 강화하는 쪽으로 확대 개편하면서 구조본 터줏대감인 이창렬 삼성중공업 부사장을 일본삼성 사장으로, 불법 정치자금에 연루된 윤석호 구조본 전무를 삼성SDS 부사장으로 승진시키는 등 구조본 출신들을 경영일선에 대거 전진 배치했다.

지난해 한 단계 승진한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는 올해 인사에서 자리변동이 없었지만 이 회장의 장녀인 이부진씨를 호텔신라 입사 2년 반 만에 상무보로 승진시켰다. 이 회장의 둘째 사위이자 동아일보 김상만 회장의 둘째아들인 김재열 제일모직 상무보도 상무로 한 계단 뛰어올랐다.

반면 LG카드 문제로 홍역을 치룬 LG그룹은 오너의 친정체제 강화를 위해 친ㆍ인척들을 대거 최고경영진에 발탁했다. 구본무 회장의 친동생인 구본준 LG필립스LCD 사장이 최고경영자(CEO) 취임 3년 만에 LG전자 부회장으로 승진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LG전선도 구태회 LG 창업고문의 장남인 구자홍 전 LG전자 회장을 전선그룹 회장으로 추대하고, 구평회 씨의 장남인 구자열 사장을 부회장으로 승진시켜 LG그룹 계열 분리 이후 확실한 친정체제를 구축했다. LG전선 계열사인 극동도시가스도 구태회 씨의 셋째 아들인 구자명 사장을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선임했다. LG상사도 구자경 명예회장의 둘째 동생인 고 구자승 LG상사 전 사장의 장남 구본걸(LG산전 부사장)씨가 최대주주가 됨에 따라 구본걸 씨의 경영일선 참여가 가시화될 전망이다.

최태원 SK㈜ 회장에 이어 손길승 SK그룹 회장의 구속으로 경영권 자체가 흔들렸던 SK는 집단경영체제로 전환, 안정을 되찾았지만 조만간 최 회장 중심의 경영체제가 구축될 것으로 재계에서는 보고 있다. ‘쌍두마차’ 경영체제가 무너진 뒤 들어선 5인 경영체제는 최 회장의 1인 체제로 가는 ‘과도 체제’가 될 것막?보인다.

금호아시아나그룹도 박삼구 회장의 친 동생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사장을 부회장으로 승진시켰다. 한국타이어도 이번에 조양래 회장의 장남 조현식 상무와 차남 조현범 상무보를 나란히 부사장과 상무로 승진시켜 친정체제를 강화했다. 삼보컴퓨터는 창업주 이용태 회장의 아들인 이홍순 부회장이 회장에 취임하면서 2세 경영을 본격화하는 등 신년 인사 철을 맞아 재계가 오너 중심의 친정체제 강화에 심혈을 쏟고 있는 분위기다.

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겸 메모리사업부 사장

고속성장 자격승진

‘실적이 높은 곳에 승진 폭이 크다’는 것도 이번 인사의 특징으로 꼽힌다. 사상 최대실적을 거둔 삼성전자는 정보통신, 메모리반도체, 초박막액정표시장치(TFT-LCD) 분야에서 승진 및 발탁인사가 많았다. 삼성은 이번 임원 승진 448명 가운데 삼성전자가 211명을 차지해 사실상 싹쓸이한 분위기. 고속승진을 의미하는 대발탁자 4명도 모두 삼성전자에서 나왔다. 삼성전자는 황창규 메모리사업부 사장을 반도체총괄 겸 메모리사업부사장으로 역할을 강화, ‘황창규 시대’를 예고했다. 직급상 수평이동이지만 상급자였던 이윤우 사장의 역할을 물려 받음으로써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의 명실상부한 총괄 사령탑이 됐다. 최근 몇 년간 메모리 사업부 사장을 맡아 과감한 승부수를 띄우며 잇따라 대박을 터뜨린 황 사장의 중용은 이미 예고됐던 일이었다.

최지성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총괄 부사장의 승진도 실적 인사의 대표적인 사례다.

LG도 중국 톈진법인을 매년 40% 이상 고속성장 시켜온 LG전자 손진방 부사장과 러시아 시장에서 성과를 올린 변경훈 상무를 각각 사장과 부사장으로 승진, 발령했다.

현대ㆍ기아자동차 역시 지난해 부진했던 내수 부문을 수출로 만회했던 해외영업본부와 미래 자동차 기술력 확보를 위한 연구개발(R&D) 본부를 중심으로 승진자의 60%가량이 집중됐다.

40대 임원 주류, 해외파 중용

사장과 임원들이 40대로 젊어지고 있다. 삼성은 CEO 후보군인 전무 자리에 젊고 참신한 인물을 대거 전진 배치함으로써 임원진이 젊어졌다. 전체 임원 중 40대 임원 비율이 인사 전 58%(687명)에서 67%(862명)로 크게 높아져 40대 임원 주류 시대를 열었다. 임원 평균연령은 47.4세.

LG 역시 LG전자 신규 임원 24명 중 20명(82%)이 45세 이하인 데다 신규 임원들의 평균 나이가 43.6세로 지난해(44세)보다 0.6세 젊어졌다. CJ그룹도 엔터테인먼트 등 신규 사업의 본격화로 40대 임원을 전진 배치했다. KT도 신규 임원의 평균 연령이 47세로 종전보다 2세나 젊어졌고, KTF도 전체 임원 52명 중 40대가 44명으로 늘어나 40대 임원시대를 맞았다.

이밖에도 치열해지는 세계 경쟁과 글로벌화에 발맞춰 해외파의 중용이 두드러지고 있다. 삼성은 임원 승진자 중 해외 부문 승진자가 91명으로 작년에 비해 44%이상 늘었다. 신규 임원 중 해외 인력도 작년보다 30% 증가하며 역대 최대 규모인 48명에 달했다.

장학만 기자


입력시간 : 2004-01-28 15:35


장학만 기자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