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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의 경영혼은 '미래읽기'였다"
<다시 이병철에게 배워라> 펴낸 이창우 교수
'어떻게'의 개념 심어준 2세 경영수업이 삼성성장의 원동력


산업심리학자로 25년간 삼성그룹 자문 역할을 맡았던 이창우(72)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입을 열었다. 25년간 2주에 한 번씩 삼성본관으로 가 2시간 정도 호암 이병철 회장과 삼성의 ‘사람 중심’경영, ‘인재 제일’ 경영관 등에 관해 숱한 이야기를 나눈 이 교수. 그는 불황으로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금 삼성만이 유일하게 독주하는 이유를 호암의 ‘경영 혼’에서 찾는다. 퇴임 삼성 임직원 친목회인 ‘성우회’ 인사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자서전 ‘다시 이병철에게 배워라’(서울문화사)를 펴낸 이 교수를 만났다.


▲ 삼성의 미래전략은 호암의 교육에서 비롯

-이건희 회장에 대한 경영 수업은 어떤 식으로 이뤄졌나.





“이병철 회장은 후계자인 이건희 회장을 교육시킬 때 무엇보다 2세 경영인으로 상황 변화에 대처하는 ‘어떻게(How)’의 개념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스스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물으며 사고를 키워나가는 소위 ‘케이스 스터디’다. 예를 들어 선거철이 다가오면 정치인들이 선거자금을 요구한다. 그 규모를 얼마쯤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실무자인 비서실장과 이건희 회장에게 똑같이 질문을 던진다. 두 사람의 대답을 비교분석한 뒤 더 나은 대답을 이 회장이 얻도록 했다. 이는 자기반성을 요구한다.

이 회장은 이 같은 테스트를 수없이 겪으며 성장했다. 오늘날 재계에서 이건희 회장 만큼 앞날과 미래에 대해 구체적인 전략 등을 강구하는 경영인은 찾기 드물다. 그날 그날 발등의 불끄기에 급급한 경영인으로서는 미래에 대해 고민할 만한 여유가 없다고 본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은 전체 흐름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남보다 고민하고 큰 물줄기를 잡으려고 노력한다. 이게 바로 호암의 교육방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장자상속 문제가 상당히 논란이 되었는데.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어느 아들이나 ‘내게 맡겼으면 잘 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생각하고 나름대로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호암에게는 장남이 아닌 3남에게 상속권을 넘겼을 때 뚜렷한 규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남 이맹희씨는 나와 동년배로 한국전 당시에 성장해 혼란한 상황속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기회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훈련도 없었다. 또 주변에서 그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가치관이 많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반면 이건희 회장은 어려서부터 일본과 미국에서 교육을 받아 이 같은 유혹으로부터 다소 벗어날 수 있었다. 맹희씨는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이 주목받고 있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특히 자신의 잘잘못이 아버지의 귀에 자꾸 들어가는 것이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가 주변으로부터 그만큼 모략중상을 받았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한 정황이다. 이건희 회장의 장인인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에 대해 불만의 목소리를 높인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맹희씨는 삼성가(家)의 장남으로서 많은 고민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둘째 아들인 고 이창희 새한미디어 그룹회장은 형제 중에서 가장 샤프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호암의 집요하고 끈질긴 사업적 근성을 꼭 빼 닮았다. 한번은 창희씨가 총무과장을 나무라던 적이 있었다. 겨울철 난방연료로 벙커C유와 경유를 놓고 각각의 가격을 물어보고 이에 따른 열량이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잘못해 얼마나 손해를 보고 있는지를 한단계 한단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이었다. 그는 박식한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괴로웠다고 한다.”

▲ 호암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물

-호암은 인간적으로 어떤 분이었나.

“차가운 사람이다. 완벽하고 철저한 성격으로 ‘삼성이 하면 다르다’는 말 자체가 호암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다. 이 같은 냉정한 이성적 판단과 합리적 사고가 오늘날 삼성을 만든 계기가 됐다고 본다. 무슨 일이든 기업에 도움이 되는지를 논리적으로 따져 보고, 아니면 자식까지 배제할 정도로 냉철한 판단력을 가진 사업가였다. 자식에게 상처를 주더라도 기업을 살리겠다는 생각이 더 강한 분이었다. 장자인 맹희씨에게 사업을 넘겨주지 않은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호암의 경영 스타일 중 특별한 부분을 꼽는다면.

“호암은 회사를 경영하면서 예상되는 모든 문제를 나열한 뒤 그 하나하나에 대해 철저한 정보 수집과 그에 따른 대책을 강구하는, 성격적으로 매우 꼼꼼한 스타일이었다. 호암을 ‘메모광’이라고 할 정도 였으니까. 단순히 ‘기억 보완용’ 메모가 아닌 ‘자기 반성용’ 메모였다. 이를 갖고 스스로 따져보고, 다시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 확인하고 그 대책을 들어보고 그래도 미심쩍으면 다시 알아보는 등 한 마디로 집요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호암은 남들이 하는 막연한 얘기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있을 수 있는 구체적인 문제점과 대책, 그 대책을 통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느냐를 따지는 편이었다. 한 번은 내가 사장단 교육을 시킨 후 일일이 사장들을 불러 강의에서 배운 것이 무엇이며 그 배움 속에서 어떤 전략을 강구할 것인지를 따져 물었다. 그리고는 강사였던 나를 불러 교육 방법에 대해 밤새워 시간가는 줄 모르고 토론한 적이 있다. 이 같은 호암의 스타일은 삼성 간부에게도 그대로 전승됐고 삼성 임원들의 업무 스타일로 굳어졌다.”

-왜 지금 다시 ‘호암’인가.

“창업주가 사망하거나 그만둔 뒤 15년이 지나도 계속 번창하는 기업은 위대한 기업이다. 이는 창업주가 만들어 놓은 뛰어난 시스템 때문이다. 1987년 11월 타계한 이병철 회장 16주기인 지난해 주력사인 삼성전자는 사상 최대의 매출 실적(43조5,800억원)을 올렸다. 이 같은 삼성의 지속적인 성장 뒤에는 이병철이라는 뛰어난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15년의 법칙’은 짐 콜린스의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라는 책에 나오는 얘기다. 이 책을 읽고 난 뒤 이 회장에 대한 책을 쓸 생각을 하게 됐다.

특정 인물의 능력만으로 굴러가는 기업은 매우 위험하다. 그 사람이 빠지면 기업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정 인물이 아닌 조직의 힘으로 성장하는 기업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기업들의 평균 수명이 고작 12.5년인 상황에서 창업주 사후 15년이 넘도록 흔들림 없는 삼성을 볼수록 이 회장의 탁월한 능력이 새삼 느껴진다.”

▲ 요즘 경영자, 책 너무 안읽어

-요즘 경영인들이 그에게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인가.

“호암은 사물을 실질적으로 보는 것에 능했다. 사업하는 것 자체가 목표였지 돈을 벌기 위해서만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현실 상황을 무시한 관념적인 것에 집착하는 것을 싫어했다. 또 ‘안 된다’는 말을 가장 못마땅하게 받아들였다. 앵무새 같이 남의 얘기를 있는 그대로 전하기 보단 자기 스스로가 이를 소화해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응전략을 제시해야 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스스로 책도 많이 읽고 궁리에 궁리를 했다. 스스로 추천도서를 선정해 회사에 알릴 정도였다. 요즘 경영자들이 호암에게 가장 배워야 할 점이 바로 책을 읽고 부지런히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경영자들은 책을 너무 읽지 않는 것이 문제다.”

-25년간 삼성그룹 자문교수로 활동할 수 있었던 계기는.

“스스로 이병철 회장에게 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다. 호암은 내가 현실에 맞춰 얘기하는 점을 사뭇 좋아하는 눈치였다. 자문으로 돈을 많이 받으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처음엔 신입사원 초봉 수준을 받았다. 2주에 한 번씩 삼성본관을 찾아 2시간 정도를 자문 했다. 또 각종 프로젝트도 수행했다. 25년간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삼성 사람들이 나의 얘기를 잘 들어주지 않으니까 자문을 할 수 있었다고 농담처럼 말한다. 내 얘기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반론을 주장 하고 서로 싸우다 보니 정도 들고 또 나 역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이야기 자체가 현실에 맞게 되는 것 같았다. 99년 초 과장 초봉을 받고 퇴임했다.”



장학만 기자 local@hk.co.kr


입력시간 : 2004-02-1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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