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 2기 경제수장, 향후 경제계 인사구도에 막강 영향력 예상청와대 '관치인사'에 거부감, '안티 이헌재 세력'도 큰 부담

이헌재 사단이 움직인다
참여정부 2기 경제수장, 향후 경제계 인사구도에 막강 영향력 예상
청와대 '관치인사'에 거부감, '안티 이헌재 세력'도 큰 부담


김진표 경제부총리 후임으로 이헌재 부총리가 임명된 지난 10일. 공식 발표 수시간 전 한국증권업협회 첫 경선에서 연임을 노리던 오호수 증권업협회장은 젊은 패기의 황건호 전 메리츠증권 사장에게 협회장 자리를 내줘야 했다. 지나친 상상력의 발현이겠지만, 증권업계 한 관계자는 이렇게 탄식을 했다. “이 부총리가 조금만 더 일찍 부총리 직을 수락했더라면 오 회장이 연임에 성공할 수 있었을 텐데….”

이 부총리와 오 전협회장은 1944년생 동갑으로 중학교 때부터 40년 가까이 끈끈한 정을 나눠 온 절친한 친구 사이다. 오 전 회장이 지난해 12월 모친상을 당했을 때 이 부총리는 사흘 내내 빈소를 찾을 정도였다. 자신의 퇴임 시점과 절묘하게 맞물려 친구가 부총리 자리에 앉은 것이 못내 부담스러웠을까. 오 전 회장은 12일 퇴임식에 앞선 기자간담회에서 주변의 미묘한 시선에 대해 이렇게 못박았다. “막역한 친구에게 부담을 줄 생각은 없다. 증권이 아닌 다른 업종의 조그마한 업체에서 고문을 맡을 생각이다.”

‘국민의 정부’ 사람이라던 이 부총리가 예상을 뒤엎고 ‘참여 정부’에서 또다시 중책을 맡으면서 이른바 ‘이헌재 사단’이 주목을 받고 있다. 사단의 멤버가 누구이냐에서 시작해 그들이 현 경제팀에서 다시 중용될 것인지, 향후 경제계 인사 구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까지 관심은 끝이 없다.

‘이헌재 사단’이란 이 부총리가 98년 초대 금융감독위원장을 맡으면서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함께 일한 관료들과 각계 전문가 그룹, 그리고 서울대(법대)와 경기고 인맥 등. 대통령이나 정치권 보스가 아닌 경제계 인사에게 ‘사단’이라는 말이 붙어 다니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의 카리스마는 가늠하고도 남을만하다. 날카로운 성격임에도 일단 한번 신뢰를 하면 속까지 모두 드러내 보이는 그의 스타일과도 적지 않게 연관이 돼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특정 집단이 경제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담겨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 “이정재는 내가 가장 총애하는 사람”

현직 고위 관료 중 그가 신임하는 대표적 인물은 이정재 금감위원장. 이 부총리는 99년 “내가 가장 총애하는 사람은 이정재다. 한 마디 하지 않아도 알아서 모든 것을 처리해 준다. 이정재는 말이 필요 없는 사람이다”고 칭찬했을 정도다. 당시 금감원 부원장으로 위원장이던 이 부총리를 든든히 뒷받침했던 그는 이제 금감위원장으로 재경부의 수장이 된 이 부총리와 함께 호흡을 맞추게 됐다.

정기홍 전 금융감독원 부원장도 구조조정 과정에서 이 부총리에게 능력을 인정 받으며 ‘이헌재 사단’의 중요 멤버에 들어갔다. 정 전 부원장은 4개 감독기관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통합기획실장을 맡아 매끄러운 일 처리 능력을 과시했다.

김영재 전 솔로몬신용정보 회장은 당시 금감위 대변인을 맡아 ‘이헌재의 입’으로 통했다. 최근 ‘이헌재 펀드’ 추진 과정에서도 대변인을 자처하며 기자들에게 펀드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이 부총리의 심중을 가장 잘 헤아리는 인사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이 부총리를 따르겠다는 뜻에서 자신의 이름 끝자인 ‘재(才)’를 이 부총리와 같은 ‘재(宰)’로 바꿀 만큼 충성스러운 것은 잘 알려진 일화다.

현재 금융권에서는 공적자금이 투입된 금융기관을 맡은 이덕훈 우리은행장과 박해춘 서울보증보험 사장은 이 부총리가 직접 낙점해 기용한 경우. 박 사장의 경우 이 부총리가 금감위원장 시절 삼성생명 상무로 있던 그를 파산위기에 몰린 서울보증보험 사장으로 스카우트하면서 인연을 맺어 지금도 수시로 만나는 사이. 김상훈 국민은행 이사회 회장, 김진만 전 한빛은행장 등도 부총리와 가까운 인물로 꼽힌다.

△ 민간 전문가 그룹도 사단의 큰 줄기

외환 위기 당시 구조조정을 위해 발탁했던 민간 전문가 그룹 역시 사단의 한 줄기를 이루고 있다. 당시 기업구조조정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읜1?리자드코리아 회장, 4대 그룹 구조조정을 담당했던 서근우 당시 제2심의관(금융연구원 팀장), 부실 기업의 뒷처리를 맡았던 이성규 당시 구조조정위원회 사무국장(국민은행 부행장)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 부총리가 한국신용평가 사장이던 85년 신입 사원으로 입사해 첫 연을 쌓았던 이성규 부행장은 지금도 스스럼없이 이 부총리에 대해 “내 인생을 뒤바꿔놓은 사람”이라고 말하곤 한다. 2000년 재경부장관 재직시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이었던 최범수 전 국민은행 부행장은 그의 연설문을 도맡아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금감원 부원장보 출신의 김기홍 충북대 교수, 권재중 현 금감위 자문관도 신임을 받는 인물들로 꼽힌다.

‘이헌재 펀드’의 운용 사령탑을 맡았던 이윤재 전 청와대 비서관은 사촌동생이며, 관계에서는 경기고 후배인 김규복 재경부 기획관리실장이 ‘이헌재 사람’으로 분류된다. 이밖에 정운찬 서울대 총장, 백영철 건국대 교수 등은 오호수 전 증권업협회장과 함께 이 부총리의 오랜 지인이다.

앞으로의 관심은 당연히 사단 멤버들이 각 분야의 전면에 배치될 것인지 여부로 쏠린다.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이 3월 중 있을 기업은행장과 우리금융지주회사 경영진 인사다.

우리금융지주 회장 후보로는 그동안 정건용 전 산업은행 총재, 윤증현 전 아시아개발은행(ADB) 이사 등이 거론돼 왔지만 ‘이헌재 효과’를 등에 업고 후보군이 대폭 늘어났다. 김진만 전 한빛은행장, 김상훈 국민은행 이사회 회장 등 이 부총리와 친분이 있는 인사들의 기용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 우리은행장 인사 구도에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개각 소식이 전해진 10일, 한 금융계 고위 인사는 “이덕훈 현 행장의 연임이 90% 이상 확실해지는 것 아니냐”고 했다. 본인이 연임을 강력히 희망하고 있는데다, 이 부총리의 우리금융지주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본인의 사람을 계속 기용하려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무려 17명의 인사가 공모에 지원한 기업은행장 인사 역시 ‘공’은 이 부총리가 쥐고 있다는 해석이 높다. 임명 제청권을 부총리가 쥐고 있어 관치 인사 시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이유 탓이다. 지금까지 유력한 후보군은 정기홍 전 금감원 부원장, 강권석 금감원 부원장, 박철 전 한국은행 부총재 등. 하지만 이 부총리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정 전 부원장 쪽으로 무게 추가 기울고 있는 분위기다.

하지만 ‘국민의 정부’ 시절과는 달리 자신의 사람들을 전면 배치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해석도 많다. 금융감독원이라는 민간 조직을 거느리면서 인사 운용에 자율권을 부여받았던 당시와 달리 지금은 재경부라는 부처 조직을 거느리게 된 데다, 총선을 앞두고 관치 혹은 낙하산 인사에 대해 청와대측이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탓이다. 특히 ‘이헌재 사단’ 못지않게 ‘안티 이헌재 세력’도 곳곳에 포진해 있는 만큼 섣불리 무리한 입김을 넣었다가 강한 반발에 부딪히는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다.

그렇다 해도, 사단의 멤버들이 어느 자리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든 물 밑에서 이 부총리의 행보에 힘을 실어줄 것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는 듯하다. 그것이 ‘이헌재 사단’의 힘이기도 할 테다.

이영태 기자


입력시간 : 2004-02-17 15:59


이영태 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