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구조 개선으로 경영권 사수, 최 회장 직할체제 구축의도 시각도

SK, 패밀리 퇴진 카드로 방어막
지배구조 개선으로 경영권 사수, 최 회장 직할체제 구축의도 시각도

자산 50조원과 계열사 59개를 거느린 재계 3위(자산규모 기준) SK그룹.

분식회계와 불법 대선자금으로 추락한 기업 이미지와 참여연대의 이사진 퇴진 요구, 외국계 펀드인 소버린자산운영의 경영권 장악 의도에 따른 위기의식 등이 ‘거함(巨艦) SK호’의 대변신을 이끌어 냈다. 오너인 최태원 회장이 SK 그룹의 지주회사인 SK㈜의 회장으로 남는 것을 제외하고 SK㈜와 핵심 계열사인 SK텔레콤에서 오너 일가와 기존의 핵심 경영자들이 최근 일선에서 모두 물러난 것이다. 이 같은 경영진 재편이 표면적으로 지배구조 개선을 통한 투명경영을 요구하는 외부의 요구에 응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파트너십’이란 독특한 방식으로 운영돼온 SK그룹의 경영구도와 관련돼 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어서 ‘SK호’가 앞으로 어떤 재편과정을 겪게 될 지 재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 “표문수 사장도 물러나라”

2월24일 오후 5시께 서울 종로구 서린동 SK본사 18층 회의실. 긴장된 표정으로 SK텔레콤 사외 이사들이 모여들었다. 참여연대가 주주제안 형식으로 제기한 손길승ㆍ최태원 이사의 해임 요구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먼저 도착해 있던 조정남 SK텔레콤 부회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최태원 회장, 손길승 회장, 표문수 사장(최 회장의 고종 사촌형), 최재원 부사장 4명 모두가 이사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했습니다.” 조 부회장의 메가톤급 발언에 어안이 벙벙해진 이사들은 재빨리 이사회가 열리는 17층 이사회실로 내려갔고, 10여분 뒤 최태원 회장이 들어와 아주 담담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며칠 동안 고민을 했습니다. 무성한 시나리오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SK패밀리 멤버는 모두 나가야겠습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이어질지 몰랐던 사외 이사들은 항의성 질문을 쏟아냈다. “불법행위도 하지 않았고, SK텔레콤 지분도 없는 표 사장이 왜 물러나야 하느냐”, “그렇게 한꺼번에 물러나면 SK텔레콤 경영은 누가 하느냐”. 그러나 최 회장은 “표 사장도 SK패밀리 멤버로 투명한 경영 구조를 이루기 위해서는 다같이 나가야 한다”며 “회사 지배구조의 획기적 개선을 위해서는 패밀리 전체가 물러나는 게 가장 강력한 시그널이고, 이사회와 관련 없는 최재원 부사장까지도 물러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곤 오후 5시50분께 최 회장은 “잘 부탁한다. 동의를 안 해도 할 수 없다”는 말을 남긴 채 이사회장을 떠났다.

사외 이사들의 끈질긴 요구에 오후 7시께 이사회장에 나타난 표 사장은 감정이 북받치는 듯한 표정으로 “지난 3년간 열심히 일했고, 회사도 잘 된 것 같으니 이젠 물러날 때가 된 것 같다”고 사의를 표명한 뒤 이사회장을 총총이 빠져나갔다. 이틀 전에 열린 SK㈜ 이사회에서도 손길승 SK그룹 회장과 황두열 부회장, 김창근 사장 등 SK㈜ 핵심 인사들이 퇴진했다.

오너 일가와 구속 수감 중인 손 회장 등 그룹 핵심 관계자들이 물러난 것은 투명한 지배구조개선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문제가 된 것은 표 사장의 동반 퇴진이다. 경영 책임을 물을 만한 이유가 없고, 최 회장의 인척이긴 하지만 참여연대를 포함해 그룹 안팎에서 전문경영인으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표 사장을 동반 퇴진시킨 이유에 대해서는 그룹 안팎에서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우선 소버린자산운용측이 SK㈜의 경영권을 노리고 있는 만큼 SK텔레콤에서 오너 일가로 분류되는 표 사장을 퇴진시켜 SK㈜ 이사직 유지에 유리한 명분을 차지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것이다. 또 최 회장측과의 불화설도 나돈다. SK그룹 전체가 힘들었던 지난해, 손 회장과 최 회장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표 사장이 SK텔레콤의 그룹 지원을 끝까지 거부했다는 것이다. 표 사장이 그룹 안팎의 신뢰를 바탕으로 최 회장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고 SK텔레콤의 독립 경영을 주장했다는 설도 있고, 기본적으로 그가 최종현 전 SK그룹 회장의 형인 최종건 SK그룹 창업자 집안의 인맥으로 분류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는 최 회장이 SK그룹을 자신의 직할체제로 바꾸기 위해 표 사장을 몰아낸 것이 아니냐는 해석으로 이어진다.

- 최 회장 직할구도로?

최 회장은 현재 경영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2대 주주 소버린자산운용측의 끈질긴 요구에도 불구하고 SK㈜의 이사에선 물러나지 않았다. 이론적으로 SK그룹의 지주회사이자 SK텔레콤의 최대 주주인 SK㈜ 회장직을 유지하면 SK그룹 전체를 통괄하는, 사실상 오너지배 체제를 갖출 수 있다. 참여연대나 SK텔레콤 노조가 최 회장의 이번 조치에 의혹의 시선을 보내는 것도 이때문이다. 참여연대는 “표 사장은 최 회장의 고종사촌 형이라는 이유로 파워게임의 희생양이 된 것 같다”며 “이사회의 행보 등을 주시하면서 필요할 경우 적절한 조치를 강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SK텔레콤 노조는 표 사장의 사퇴에 반대하는 연대서명에 들어가면서 “번호이동성 경쟁 등으로 전쟁을 방불케 하는 현 상황에서 강력한 리더십으로 회사 발전에 헌신해온 표 사장의 사퇴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표 사장의 사퇴는 즉각 철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조는 서명 작업이 끝나는 대로 최 회장과 직접 만나 담판을 짓겠다는 벼르고 있다. 하지만 주주총회가 얼마남지 않은 데다 표 사장도 물러난다고 밝힌 만큼 그의 퇴진 철회 가능성은 아주 적다.

SK텔레콤의 경우, 앞으로 주주총회를 좀더 지켜보아야겠지만 오너 일가 퇴진이후 SK그룹은 계열사별로 이사회 중심의 전문경영인 체제를 구축한 뒤 SK㈜와 SK텔레콤의 대표 이사들로 구성되는 ‘경영협의회’의 지휘아래 운영될 것으로 보인다. SK㈜는 최 회장과 이번에 신임 이사로 추천된 신헌철 SK가스 대표이사 부사장이 SK㈜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공동 대표이사 체제로 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또 SK텔레콤은 이사로 남은 조정남 SK텔레콤 부회장과 새로 선임된 김신배 사장의 공동 대표체제로 방향이 정해질 전망이다.

어떻든 SK그룹은 3월12일 SK㈜ 주총에서 표 대결을 통해 경영권을 빼앗으려는 소버린자산운용측의 공세를 ‘오너 일가 퇴진’에 따른 ‘지배구조 투명화’라는 명분으로 김을 빼놓는데 성공했다. 주총에서 경영권을 방어하게 될 가능성도 덩달아 높아졌다. SK호는 3월의 대격전 후 SK㈜의 최 회장과 신 사장, SK텔레콤의 조 부회장, 김 사장 4명이 키를 잡고 새 출발을 다짐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황양준 기자


입력시간 : 2004-03-02 22:34


황양준 기자 naiger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