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불법대선자금 수사, 대기업 총수에 면죄부 주고 막 내려

'檢의 터널' 지난 재계… "회장님, 이제 들어오시죠"
검찰 불법대선자금 수사, 대기업 총수에 면죄부 주고 막 내려

“ 삼성 이건희 회장은 왜 입건하지 않았습니까?”

대검 안대희 중수부장은 5월 21일 서울 서초동 대검 기자실에서 기자가 던진 송곳 같은 질문에 사뭇 당혹스러운 듯 안경을 치켜 올리며 말을 꺼냈다. “ 불법 자금 전달에 개입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이 회장은 외국에 있어서 내용을 잘 몰랐다고 하더군요.” 기자의 질문은 속사포 같이 이어졌다. “ 삼성에서 구입한 채권은 전부 이 회장의 개인 재산이라는 말입니까?” 안 부장은 기자의 시선을 피해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 그렇습니다. 개인 재산으로 구입했다는 삼성측 주장을 반박할 (법인자금으로 볼 수 있는) 정황도 증거가 없더군요. 이를 깰 방법이 없었습니다.” 안 부장은 말끝을 흐렸다.

기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다시 반문했다. “그럼 이 회장 개인 재산을 처분하는데 이학수 부회장은 300억원 대의 채권 구입 사실을 이 회장에게 보고도 하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됩니까?” 안 중수부장은 한편으론 자신도 어느 정도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대답은 달랐다. “ 이학수 부회장이 이 회장의 재산 관리를 하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재산 규모가 워낙 커서 보고를 일일이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본인이 다했다’고 진술하더군요. 그뿐입니다.”

삼성그룹 이학수 구조본부장 겸 부회장은 이날 대검 중수부로부터 불구속 기소됐다. 이건희 회장의 개인돈 300여 억원을 이 부회장이 한나라당과 노 캠프의 최측근인 안희정씨, 자민련 김종필 전 총재에게 전달한 혐의다. 이 부회장은 삼성의 정치 자금 제공은 본인 스스로 다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이 회장의 인지ㆍ개입 여부를 극구 부인했다.

- 대통령과 회동 위해 속속 귀국

불법 대선 자금 수사의 태풍권에서 벗어나 미국과 일본 등 해외 출장에 나섰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5월 25일 노무현 대통령과 재벌 총수들과의 모임이 열리기 직전인 22일 밤에 전용기를 타고 귀국했다. 불법 대선 자금 수사가 진행 중이던 지난 1월 19일, 노 대통령과 대기업 총수들과의 오찬 모임을 마친 직후 출국했던 이 회장으로서는 4개월 만의 귀환이다. 그 동안 해외에서 정중동(靜中動)의 모습을 지켜 온 이 회장은 해외 석학들과 유명 기업인들을 만나 세계 경제 흐름과 기술 개발 동향 등을 점검하고 수시로 이 부회장으로부터 그룹 현안 처리 상황과 국내 경기 동향 등을 보고 받아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이 부회장의 불구속 기소로 삼성에 대한 불법 대선 자금 수사가 마침내 마무리되면서 그 멍에와 굴레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이 회장으로서는 그래서 이번 대통령과의 회동이 주는 감회가 남다를 수 밖에 없다. 지난해 6월 1일 효자동 삼계탕집 회동 당시 노 대통령은 오른쪽 옆에 앉았던 이 회장과 약간 틈이 벌어져 있자, “회장님과 자리를 가깝게 해달라”고 의전팀에 주문했고 기념 사진을 찍은 뒤 “(대통령이 그룹 총수와) 가까이 있는 사진이 나가면 뭔가 잘 되겠구나 하고 국민들이 안심할 것” 이라고 말해 남다른 우애(?)를 강조했던 터다. 거의 1년 여 만에 갖는 이번 회동에서 이 회장은 과연 어떤 보따리를 풀어 보일지, 또 ‘성장’ 보다는 ‘개혁’을 강조하는 노 대통령과 이 회장간에 과연 어떤 대화와 덕담이 오갈 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 "죽어버리겠다" 협박에 곤혹

정치권은 물론 재계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대검 중수부의 대선 자금 수사는 작년 8월말 SK비자금 사건으로 촉발된 이후 10개여 월을 끌며 수 많은 뒷얘기를 남겼다.

수사 대상에 오른 삼성과 LG, 현대자동차, SK 등 대기업들은 검찰의 거듭된 자수ㆍ자복 요구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의 눈치를 보느라 비협조적으로 나오기가 일쑤였고 일부 대기업 총수들은 이러 저러한 명분을 내세워 일찌감치 출국해 버려 소환 조사를 어렵게 만들었다. 기업이 정치권에 제공한 채권을 추적하기 위해 명동의 사채 시장을 이 잡듯이 샅샅이 뒤지며 수많은 계좌를 쫓던 검찰이 출처불명의 괴자금을 포착함으로써 전두환 전대통령의 비자금 수사가 재개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명동에서 ‘ 큰 손’ 노릇을 하는 사채업자는 검찰의 조사 대상이 됐고, 그로 인해 사채 시장은 때 아닌 한파를 맞아야 했다. 검찰이 사채 시장과 대기업에 대한 저인망 수사 과정에서 뇌물로 쓰였던 것으로 추ㅅ풔?검은 채권이나 수표가 상당수 포착됐고, 각종 비리 관련첩보도 수북이 쌓였다는 것은 수사팀 안팎의 공공연한 비밀.

사실 검찰은 지난해 10월 SK 이외의 5대 기업으로 수사를 확대할 때만 해도 ‘ 빈손’이었다. 수사 단서 조차 없이 심증만으로 수사를 시작한 뒤 안 중수부장은 5대 그룹 부회장급 인사들을 대검 청사 밖에서 만나 ‘수사 협조’를 당부했다. 그러나 반응이 없자 안 부장은 압박용 압수 수색과 총수 비리 내사를 공개하며 압력 수위를 높였다. LG측이 먼저 ‘한나라당에 차떼기로 150억원 제공’ 사실을 털어 놓으면서 수사는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안 부장은 “ 대통령이 불법 자금 수수와 무관치 않다는 정황이 나왔을 때와 LG의 자백이 있기 이전까지 기업들과 줄다리기를 했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술회할 정도였다.

기업 수사팀을 이끈 이인규 원주지청장은 기업의 기피 대상 1호였다. 지난해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사부장 당시 SK 등 대기업 비리를 꿰찼던 그가 언제 원주로 복귀할 지가 대기업의 주요 관심사였을 정도다. 대통령 측근 비리 수사를 맡은 남기춘 중수1과장은 강력부 검사 경력 덕분에 여권으로부터 ‘측근들을 깡패 다루듯 한다’는 말까지 들으며 ‘손 봐야 할 사람’으로 꼽히기도 했다. 유재만 중수2과장은 ‘차떼기’ 등 굵직한 성과물을 찾아내 한나라당의 원성을 샀다. 유 과장이 지휘한 사채시장 수사로 검찰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추가 비자금 373억원을 찾아내는 예상 밖의 소득을 올리기도 했다.

수사를 받는 기업들의 대응도 천차만별이었다.

안상영 부산시장과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이 검찰 조사를 받은 후 자살하자 검찰은 ‘ 자살 협박’에 시달릴 정도였다. 검찰 조사를 받던 삼성그룹의 한 고위간부는 “ 죽고 싶다”고 말했고, 구토까지 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롯데그룹의 한 계열사 사장 역시 “ 죽어버리겠다”며 검찰을 협박하기도 했다. 한 기업인은 “ 유서까지 써놓고 왔다”며 진술을 거부하기도 했다. 현대차가 한나라당에 제공한 100억원의 출처는 현대가(家) 재산을 관리해 오던 집사역의 한 임원을 소환 조사하는 과정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이 임원은 그 동안 고 정주영 명예회장을 비롯해 현대가의 자금을 주로 관리하는 일을 도맡아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 롯데의 경우, 일본에 체류하며 소환에 불응한 신동빈 부회장이 일본 야구장에서 팔짱을 낀 채 웃는 모습으로 이승엽 선수의 배팅 연습을 지켜보는 장면이 TV 스포츠뉴스에 보도되는 바람에 이를 본 수사팀이 공분, 수사 강도를 높였다는 후문이다. 재벌 회장으론 유일하게 구속된 손길승 SK 회장은 “ 내 덕분에 다른 회장들이 여기 오지 않는 것”이라며 심경을 전해 재계의 공감을 사기도 했다.

- 성과 불구 "경제권력에 굴복" 비판도

한국판 ‘ 마니 폴리테(깨끗한 손)’로 불린 이번 검찰의 수사는 ‘ 검은 돈을 주고 특혜를 얻는다’는 정경유착의 상징인 정치권과 재계의 유착 고리를 끊고 정치권의 개혁을 이끌어 내 국민들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을 만큼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기업 총수 대부분에게 면죄부를 줌으로써 그 한계를 드러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정치권으로부터의 독립은 이룬 반면 경제 권력에 대해선 굴복했다는 지적이다.

검찰은 불법 자금 제공 여부보다 앞서 비자금 조성이나 횡령 등 기업의 이름으로 자행된, 보다 본질적인 비리도 좌시하지 않겠다며 강조해 왔다. 그러나 불법 자금 제공 혐의로 형사 처벌된 재벌 총수는 손길승 전 SK 회장과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등 2명에 그쳤다. 검찰은 한나라당에 100억원 이상을 제공한 것으로 드러난 삼성, LG, 현대차 등의 재벌 총수들을 전원 불입건 조치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정몽구 현대차 회장 역시 불법 대선자금에 관여한 증거가 없다며 불입건 처리했다. 이에 앞서 구본무 LG회장도 불입건 처리로 매듭지었다. 또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과 신동빈 부회장이 검찰 소환에 불응했는데도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불입건 처리를 했다. SK그룹도 고용 회장인 손길승 회장만을 사법처리 했을 뿐 실질적인 회장인 최태원 회장은 불입건 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경우 기소중지를 결정했다. 검찰은 기업체 총수들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 여론을 의식한 듯 이번 수사의 초점이 정치권의 불법 정치 자금 수수에 맞춰져 있다는 점을 강조했고, 기업인들이 정치권의 요구에 따라 제공한 점과 국가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 점등을 고려해 처벌 범위를 최소화했다.

대신 검찰은 각 기업의 구조조정 본부장급 임원에 대해서는 전원 불구속 기소하는 수준에서 마무리했다. 불구속 기소된 기업인은 이학수 삼성그룹 부회장, 강유식 LG 그룹 부회장, 김동진 현대차그룹 부회장, 심이택 대한항공 부회장, 신동인 롯데쇼핑 사장, 임승남 롯데건설 사장, 김연배 한화증권 부회장, 박찬법 아시아나항?사장, 오남수 금호그룹 사장,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 이재경 두산그룹 사장 등이다. 그러나 저 같은 선처가 정경유착의 재발을 막고 비자금 조성 관행을 없애는 등 기업의 투명성을 높이는 데 실제 기여할 수 있을 지는 여전히 의문시되고 있다. “경제 권력 앞에선 검찰이 무력해 보인다”고 비판 받는 것도 그래서이다.

재벌 기업들은 1996년 전직 대통령 비자금 수사 당시 내로라 하는 기업 총수 7명이 뇌물공여 혐의로 줄줄이 기소되는 홍역을 치른 지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아 여전히 정치권의 돈줄 역할을 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이번 대선자금 수사를 두고 “ 처벌 수위 및 대상이란 기준에서 볼 때 오히려 전직 대통령 비자금 수사나 SK 수사 보다도 미진하다”는 평가가 내려지는 게 그래서다. 박근용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팀장은 “ 검찰이 실무자들만을 적당히 기소하고 총수들에게는 면죄부를 주기로 결정한 것은 납득키 어려운 부분”이라며 “ 수백 억원 대의 불법 자금을 정치권에 건넨 것을 총수들이 몰랐다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 이번 수사는 결국 용두사미로 끝난 것”이란 말이다.

장학만기자


입력시간 : 2004-05-26 20:20


장학만기자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