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기업 10%가 외국자본의 경영권 위협에 직면증시 외국인 비중 40%대, 투자제도 개선 필요한 때

알짜기업 경영권, 외국 투기자본 사냥감으로 노출
상장기업 10%가 외국자본의 경영권 위협에 직면
증시 외국인 비중 40%대, 투자제도 개선 필요한 때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소위에서 정부측과 정무위소속 여,야 의원들이 공정거래법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 이종철 기자

SK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SK㈜와 외국계 투자펀드 소버린 간의 경영권 공방 재개 양상을 바라보는 재계의 시선은 착잡하기만 하다. 2,000억원도 안 되는 돈으로 14.99%의 지분을 사들인 외국인 주주가 매출 규모 50조원에 달하는 재벌 그룹을 흔들어대는 상황이 놀랍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 같은 일이 언제든지 자신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IMF 외환 위기 이후 자본 시장이 활짝 개방되면서 상당수 국내 기업들은 주식 시장을 통한 외국인 자본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게 현실이다. 증시를 쥐락펴락하는 외국인의 영향력은 이미 적지 않은 기업들의 경영권 자체를 위협할 만한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 한국대표기업 상당수 외국인 지분율 높아

실제로 지난달 말 증권거래소가 내놓은 자료는 이런 현실을 재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12월 결산 485개 상장 기업 가운데 외국인 지분율이 국내 최대 주주(특수관계인 포함)보다 높은 경우는 총 48개사로, 전체의 9.9%에 달한다. 상장 기업 10곳 중 1곳은 경영권 위협에 노출돼 있다는 말이다.

이들 48개사에 대한 외국인의 평균 지분율도 44%선에 달해 국내 최대주주의 평균 지분율 27%보다 17%나 높게 나타났다. 특히 외국인 지분율이 50%를 넘는 기업은 12개사로 지난해 말에 비해 2배나 늘었고, 30%~50%대의 기업도 48개사에 이르렀다.

주목되는 것은 외국인 지분율이 국내 최대 주주를 넘어서는 현상이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들 상당수에게서 벌어 지고 있다는 점이다. 외국인 지분율 상위 20개사만 살펴보더라도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포스코, SK㈜, SK텔레콤, 신세계, 대림산업 등 각 업종별 대표 주자들이 거의 모두 망라돼 있다.

세계 일류 철강 회사로 통하는 포스코의 경우, 국내 최대 주주인 포항공대의 지분율은 고작 12.55%인 반면 외국인의 지분율은 무려 68.75%에 달해 사실상 외국인 회사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소버린과의 경영권 분쟁에 휘말려 있는 SK㈜의 경우도 외국인 지분율이 61.18%로 국내 최대 주주인 SKC&C의 17.53%를 압도하고 있다.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전자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회사의 최대 주주인 이건희 회장의 지분율은 24.35%로 외국인 지분율 55.34%에 비해 30% 이상 뒤지는 실정이다. 최근 삼성측이 공정거래법 개정을 둘러싸고 정부, 시민 단체 등과 힘겨루기를 벌이는 와중에 “ 삼성전자도 외국인의 적대적 인수 합병 대상이 될 수 있다”며 위기감을 토로한 게 괜한 엄살은 아닌 셈이다.

재계의 불안감은 지난 5월 대한상공회의소가 증권거래소 상위 200개 기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조사에 따르면 36개의 기업(18%)이 현재 경영권 유지에 불안감을 가지고 있거나 앞으로 경영권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 기업들은 불안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로 외국인 지분 증가(30%)를 들었으며, 이어 주식가치 저평가(27%), 지배주주 지분 감소(21%), M&A 방어 제도 미흡(15%) 등을 꼽았다. 주식 가치 저평가는 한국 증시의 구조적 문제라는 점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외국인의 공세가 가장 두렵다는 말과 다르지 않은 결과다.

국회 상임위 정무위에서 강철규 위원장(왼쪽)이 출자총액제한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중 개정법률안을 진지한 표정으로 읽고 있다. / 고영권 기자

기업들이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은 최근 주식 시장의 외국인 비중이 2000년 초보다 2배 이상 뛴 40% 중반에 이르는 데다, 의결권 제한 규정으로 인해 효과적인 경영권 방어가 어려운 현실 때문이라고 대한상풔?분석했다.

한 재벌 그룹의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 국민의 정부 시절 자본 시장을 전면 개방하면서 외국인 투자를 유도한 것은 당시 사정상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면서도 “하지만 직접 투자와 달리 간접 투자자 중에는 투기 자본들이 너무 많으며, 이 때문에 한국 기업들의 경영권이 직접적으로 위협 받고 있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지적했다.

외국인 주주들의 영향력이 증대하면서 생기는 부작용은 경영권 위협만이 아니다. 영업 활동으로 벌어 들인 이익의 상당 부분을 외국인 주주들에게 배당하거나 경영권 유지를 위한 자사주 매입 등에 사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투자 활동이 위축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특히 자동차, 반도체 등 선(先)투자가 경쟁력 유지의 핵심 요소인 기업들의 투자 위축은 장기적으로 국가 경제에 큰 타격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 "정부 시장개입 결코 없을 것"

국내 대기업들은 이처럼 외국인의 경영권 위협에 어느 때보다 긴장하고 있지만, 정부는 이 사안에 대해 다소 중도적인 입장인 것으로 비친다. 공정한 시장의 관리자로서 어느 한 쪽을 편들기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윤증현 금융감독위원장이 10월 27일 미국 뉴욕서 열린 ‘코리아 소사이어티’ 초청 강연 후 현지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밝힌 견해는 정부의 정책 방향을 어느 정도 드러낸 것이라는 평이다.

윤 위원장은 이날 간담회에서 “ 국내 기업에 대한 외국인의 적대적 M&A(인수 합병)는 역기능만 있는 게 아니라 순기능도 많으며, M&A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고 해서 당장 정부가 새로운 제도나 규정을 마련할 수는 없다”고 말해 시장에 대한 개입 의사가 없음을 시사했다.

그는 또 SK㈜와 소버린의 경영권 분쟁에 대해서도 “ 규칙과 법률을 어기거나 범법 행위가 있을 경우에는 정부가 시장 조정자 입장에서 제재를 해야 하지만, 기업 경영은 결국 해당 회사와 주주 간의 문제이므로 당국이 개입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기업들에게 이 같은 윤 위원장의 발언은 다소 매정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적지 않은 시장 전문가들이 정부의 섣부른 시장 개입을 경계하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이런 시각의 바탕에는 외국인 투자자들의 입김이 커진 것이 부작용만 낳지는 않았다는 분석이 깔려 있다. 즉 국내 기업들이 외국인에게 경영권을 뺏기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자연스레 기업 지배구조가 개선되고 경영 실적이 향상되는 등 작지 않은 소득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최근 공정거래법 개정을 둘러 싸고 삼성전자의 적대적 인수합병 가능성을 제기하며 정부를 압박한 재계의 움직임을 재벌 오너들의 이기주의로 폄하하는 시각도 있다.

그렇지만 시장의 대체적인 여론은 한국 경제의 버팀목인 알짜 기업들이 투기 목적의 외국인에게 손쉽게 넘어가는 사태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쪽에 가 있는 듯하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 IMF 이후 외국인 투자 활성화를 위한 방향으로 제도가 바뀌면서 국내 기업에 대한 적대적 인수 합병이 수월해졌다”며 “ 이제는 제도의 역효과에 대해 진지한 분석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김윤현 기자


입력시간 : 2004-11-10 16:51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