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는 시장원리에 충실해야"경제난맥상 해소 위한 선결과제로 꼽아, 재벌역할에도 비판적 시각

KDI 첫 정년퇴직 유정호 연구위원
"한국경제는 시장원리에 충실해야"
경제난맥상 해소 위한 선결과제로 꼽아, 재벌역할에도 비판적 시각


가까이로 정릉천이 흐르고 빌딩 숲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그래서 서울 도심에서도 비교적 호젓한 곳(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207-41)에 한국개발연구원(KDIㆍKorea Development Institute)이 자리잡고 있다. 1971년에 설립된 KDI는 대표적인 국책 연구기관으로서, 70년대 이후 줄곧 경제 발전의 밑그림과 정책 대안을 제시해온 ‘한국의 싱크탱크’다.

KDI 24년 근무, 격동의 한국경제 지켜봐
그로부터 30여 년. 녹록치 않은 연혁을 쌓은 KDI가 올 연말 첫 정년 퇴직자를 배출하게 된다. 주인공은 산업ㆍ기업경제 연구부의 유정호 선임연구위원(60)이다. 그 동안 1,000여 명의 인재들이 KDI와 인연을 맺었지만 정년을 채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워낙 뛰어난 두뇌들인 까닭에 외부로부터 스카우트 유혹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정호 연구위원은 미국의 위튼 칼리지(메사추세츠주 소재) 교수 자리를 버리고 선택한 KDI와 1981년 이래 꾸준히 함께 해 왔다. 나라 살림을 일으키는 데 밀알이 되겠다는 대학 시절부터의 다짐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 사이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부에 이어 현 정부까지 정권은 네 차례나 바뀌었고, 국가 경제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경제 정책 수립과 불가분의 관계라고 할 수 있는 KDI에서 24년을 근무한 유 연구위원. 그의 눈에는 지난 세월 우리 경제가 걸어온 길이 어떻게 비쳐졌을까.

“제가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공부하던 70년대는 세계 경제학계가 공업화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발견으로 다들 놀랐던 시기죠. 아시아의 신흥 공업국, 특히 한국과 대만의 빠른 경제 성장은 경제학자들의 기존 상식을 완전히 깨뜨린 사례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강의 시간에 지도 교수가 한국을 경제 발전의 새로운 모델로 거론할 때는 가슴이 뿌듯해지기도 했어요.”

유 연구위원의 회고처럼 한국은 1970년대 고속 성장을 거듭하며 아시아의 용(龍)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야심차게 추진한 중화학 공업 육성 정책은 70년대 후반 우리 경제의 발등을 찍는 자충수가 되고 만다. “70년대 중반부터 박 정권은 중화학 공업에 국가의 재원을 쏟아 부었는데, 이 과정에서 경공업이 상대적으로 소홀한 대접을 받게 됩니다. 이로 인해 그 때까지 수출의 주력을 이루던 경공업의 경쟁력은 떨어지고, 중화학 공업은 투자한 만큼 일찍 결실이 나타나지 않는 이중고가 한국 경제를 엄습합니다. 70년대 초반 30%를 넘나들던 수출 증가율은 해마다 떨어져 1979년에는 마이너스를 기록했고, 그 여파로 1980년에는 마침내 경제 성장률 –4.2%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은 것이죠.”

이런 점에 주목하는 유 연구위원은 박 정권의 몰락이 장기 독재라는 정치적 악수 못지않게 경제적 실책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는 해석도 내놓았다. “박 전 대통령은 사실 경제적인 성과 덕에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그런데 중화학 공업 육성에 무리수를 둬 경제가 추락하면서 그의 인기도 동반 추락하기 시작했습니다. 1979년 부마사태가 불거진 것도 수출이 급락하면서 당시 국내의 대표적인 수출 기지인 부산과 마산, 두 도시의 민심이 악화된 게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KDI는 70년대 후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중화학 공업 드라이브가 국가 경제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는 판단 아래, 정책 방향을 수정할 것을 청와대에 여러 차례 진언했다고 한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박 전 대통령도 이를 받아들여 1979년 4월 사실상 중화학 공업 육성 정책을 중단하는 내용의 ‘경제 안정화 종합 시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불과 반 년 뒤 찾아올 운명의 날을 앞둔 그에게, 결정은 때늦은 것이었다.

유 연구위원이 KDI에 부임한 1981년은 전두환 정권의 초창기였다. 경제 성장은 정체되고 체감 물가상승률이 30%를 웃돌 만큼 인플레가 심각했던 70년대 후반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경제 정책이 수립됐다. 훗날 미얀마 아웅산 국립묘지 폭탄테러 사건(1983년)으로 순직한 김재익 청와대 전 경제수석이 정책의 설계자로 활약했다.

1986년 미국과의 무역마찰 땐 해결사로
국가 경제는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 갔지만, 새로운 문제가 골칫거리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미국과의 무역 분쟁이었다. 1980년대 초부터 부상한 미국의 보호무역주의는 한국의 수출 주력 산업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온 터였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풀지 못하던 정부는 1986년 급기야 미국통인 유정호 연구위원을 ‘해결사’로 발탁해 미국에 파견한다.

“당시 미국에는 우리 정부가 돈을 대 운영하는 KEI(Korea Economic Institute)라는 연구기관이 있었죠. 저는 한국의 입장을 미국 의회와 행정부에 알리는 임무를 띠고 그 기관에 파견됐던 것입니다. 알다시피 미국 의회나 행정부 사람들을 만나 뭔가를 설득하려면 로비스트로 등록을 해야 하는데, 한국의 국책 연구기관 소속이라는 제 신분이 결국 걸림돌이 돼 제대로 된 활동조차 못하고 말았습니다.” 유 연구위원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며, 미국의 대표적 싱크탱크인 브루킹스 연구소에서 1년 간 내공을 더 쌓은 뒤 1988년 귀국한다.

한국 경제 발전사에서 재벌의 존재는 항상 논란의 대상이다. 당사자인 재벌이나 이들을 옹호하는 쪽에서는 재벌의 역할론을 전가의 보도로 내세운다. 황무지나 다름없던 국가 경제를 일으키는 데는 재벌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정호 연구위원은 재벌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나타낸다. 재벌은 정경유착을 통해 덩치를 키우는 데만 몰입했지, 국가 경제 전체 차원에서 보면 비효율의 집합체라는 것이다. 그는 기업의 수익성을 나타내는 총자산 경상이익률(ROA)이라는 지표를 근거로 든다.

“전체 기업에서 5대 재벌이 차지하는 자산 비중은 1985년에 16%였다가 IMF 직전인 1997년에는 40%까지 늘어납니다. 문제는 재벌들의 ROA가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는 항상 비재벌 기업들보다 낮았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수익성이 떨어지는 기업들이 국가 재원을 더 많이 끌어다 써왔다는 사실이죠. 그 결과는 기업과 금융기관의 동반 부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IMF 경제 위기가 찾아온 것도 이와 무관치 않습니다.”

비단 재벌 문제뿐만 아니라 한국 경제의 여러 난맥상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시장 경제 원리의 작동이 선결과제라는 게 유 연구위원의 한결같은 신념이다. 참여정부 들어 시장 경제와 관련한 논쟁이 간혹 불거지는 데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우리나라가 언제 시장 경제를 제대로 해본 적이 있습니까?” 지금까지 어느 정부도 관치(官治) 경제의 유혹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쓴소리다.

국책 연구기관 소속의 ‘공무원’치고는 뜻밖에도 정부에 대한 비판 강도가 좀 센 듯했다. 눈치라도 챈 듯 유 연구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KDI에 대해 ‘정부의 시녀’니 뭐니 하는 편견이 존재하는 것을 알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오히려 KDI는 잘못된 정책을 꼬집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고 자부합니다.”

유 연구위원은 12월 31일 정년 퇴임식을 가진다. 하지만 KDI는 쉽사리 그를 놓아주지 않기로 한 모양이다. 정년 퇴직 1호를 기념해 ‘명예연구위원’이라는 직제를 신설한 것이다. 경륜 있는 학자의 노하우를 썩히지 않게 돼 다행이다.

김윤현 기자


입력시간 : 2004-12-22 16:10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