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카드 사용액 증가 등 반전 징후 곳곳서 포착기업 투자심리 개선, 경기 회복세 확산 조짐

내수경기 '꿈틀' 경제 '봄날' 움트나
신용카드 사용액 증가 등 반전 징후 곳곳서 포착
기업 투자심리 개선, 경기 회복세 확산 조짐


‘윗목은 서서히 데워지고 있는데 아랫목에는 언제쯤 온기가 전달될까.’

기나긴 침체에 빠져 있던 내수 경기가 조금씩 살아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경기 부양 대책 마련에 골머리를 앓아 왔던 정부 당국자들은 물론, 기업 가계 등 각 경제 주체들도 요즘 나타나는 긍정적 신호에 촉각을 곤두 세우고 있다. 관심은 ‘정말 경제가 살아나는 것일까’로 모아진다.

소비가 일시적으로 늘어나는 연말 연시의 계절적 특수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최근 두어 달 동안 곳곳에서 들리는 ‘플러스 지표’들은 분명 경기가 바닥을 찍고 반전하고 있음을 알리는 징후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반면 경기가 확실하게 부활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아직까지 무리라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상당수 서민들의 체감 경기는 여전히 냉랭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경기의 변동에서는 ‘모멘텀’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계기만 마련된다면 회복세가 빠르게 확산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소비 진작 조짐은 무척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지갑이 열린다
국내 굴지의 그룹 계열사에 다니는 C대리(34)는 지난 연말 자기 연봉의 3분의 1에 가까운 1,000만원 가량의 특별 성과급을 손에 쥐었다. 지난해 사상 최대의 실적을 거둔 회사가 임직원들에게 두둑한 보상을 해 준 덕분이다.

그는 전업 주부인 아내와 두 아이를 둬 평소 씀씀이가 작았지만, 이번 연말 연시에는 두 달 동안 무려 400만원을 용돈으로 펑펑 써댔다. 직장 동료나 친구들과 여러 차례 고급 술집에 들러 맘껏 즐겼는가 하면, 가족들과도 오랜 만에 외식과 쇼핑을 다니며 가장 노릇을 톡톡히 했다.

C대리는 “연봉만으로는 살림을 꾸려 가기에 빠듯한 게 사실이지만, 모처럼 ‘과욋돈’이 생겼다는 즐거움에 별 거리낌 없이 돈을 쓰고 다녔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아내에겐 미안하지만 이번에 받은 성과급 중 일부는 비자금으로 챙겨 뒀다”며 “술자리가 생기거나 개인적으로 사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돈 좀 쓸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꼭꼭 닫혀 있던 가계 부문의 지갑이 열리고 있다. 지난 연말 두툼한 보너스를 받은 대기업 임직원들과 고소득 계층 등이 돈을 쓰기 시작하면서 소비 심리가 완만하게나마 호전되는 기미다. 백화점과 할인점 등 유통업체들은 1월 매출이 상승세를 나타냈고, 신용카드 사용 액수도 증가세로 돌아섰다. 대표적 고가(高價) 내구재인 자동차 판매량도 지난해 4분기 눈에 띄는 호조를 나타냈다.

1월 정기 세일(7~22일)을 얼마 전에 끝낸 주요 백화점들은 모두 매출 실적이 늘었다며 미소를 감추지 못한다. 롯데, 현대, 신세계 백화점 등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적게는 6%에서 많게는 9%대까지 매출액이 신장했다(식품 부문 매출 제외). 실제로 1월 정기 세일 기간 동안 각 백화점에는 고객들의 구매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백화점 업계의 이 같은 실적은 2003년 2월부터 지난해 11월까지 두 차례를 제외하고는 전년 동월 대비 마이너스 신장률이 지겹도록 이어진 점을 감안하면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신용카드 사용 액수가 늘어나고 있는 것도 내수 경기 회복의 청신호로 꼽힌다. 지난해 4분기 카드 사용액(현금 서비스 제외)은 44조8,65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0.6%나 증가했다. 이는 45조8,250억원을 기록했던 2002년 4분기 이후 분기별 실적으로는 최고치다. 지난해 카드 사용액은 연간 실적으로도 2003년에 비해 0.6% 늘었다는 것이 카드 업계의 분석이다.

이 처럼 지난 4분기 신용카드 사용액이 증가세로 돌아선 이유에 대해 카드 업계 관계자들은 대체로 “중산층이나 고소득층 등 우량 고객들이 카드 소비를 늘린 데 따른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성매매 특별법에 따른 단속이 느슨해지면서 남성들의 ‘밤 문화’ 지출이 다시 늘어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코스닥 등 증시 상승세도 일조
“요즘 코스닥이 심상치 않은 것 같아. 불과 보름 만에 대박을 터뜨린 기업들도 나오고 주가 상승률도 놀라울 정도야. 한 번쯤 뛰어 들어도 괜찮지 않을까?” “맞아. 요즘 마땅히 투자할 곳도 눈에 잘 안 띄는 마당인데 코스닥이 뜨는 걸 보면 그냥 있기가 아쉬워.” 1월 25일 저녁 무렵 서울 중구 무교동의 한 술집. 30대 중후반 남성들로 이뤄진 일행 한 팀이 소주잔을 기울이며 대화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야기의 주제는 정초부터 뜨겁게 달아오른 코스닥 랠리였다.

대화가 무르익자 금융 전문가인 한 참석자가 결론을 이렇게 내렸다. “단기간에 급등세를 보여 불안한 감도 약간 있지만, 지금 코스닥의 상승은 대세로 보여. 내실 있는 알짜 기업들도 많은 것 같아. 정부 정책도 그렇고 기관 투자자들의 움직임도 그렇고 투자 여건은 괜찮다고 봐.”

요즘 재테크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이면 어김없이 나오는 이야기가 코스닥 시장과 증시에 관한 것이다. 코스닥은 정부의 벤처 활성화 대책이 발표된 지난 연말 이후 놀랄 만한 상승세를 기록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29일 370포인트 대에서 랠리를 시작한 코스닥 지수가 1월 26일 현재 460포인트 대로 무려 24% 이상 치솟은 것이다. 이에 따라 외국인이나 기관 투자자는 물론 개미 투자자들의 행렬도 꾸준히 유입되고 있다.

주식 시장의 움직임은 대표적인 경기 선행지표. 때문에 연초부터 벌겋게 달아오른 주식 시장은 조만간 경기가 살아날 것임을 예고하는 신호탄으로 전문가들은 해석하고 있다. 또한 경제부처 당국자들도 주가 상승에 대한 기대감이 투자자들의 소비로 활발하게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른바 ‘부(富)의 효과(wealth effect)’에 의한 소비 증가다.

기업들 경기 전망도 호전
기업들의 투자 역시 내수 경기 회복에 빠질 수 없는 중대 변수다.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기업들은 경기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투자를 꺼려 왔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올 들어서는 기업들의 투자 심리가 많이 개선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산업자원부가 제조업체들을 대상으로 최근 실시한 경기실사지수(BSI)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 기업의 절반에 가까운 46%가 ‘하반기 이후 본격적으로 경기가 회복될 것’으로 내다보는 것으로 밝혀졌다. 물론 ‘내년 이후나 돼야 경기가 좋아질 것’이라고 보는 기업들도 35%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올 하반기가 됐든 내년 이후가 됐든 경기가 회복되기 전에 투자 활동이 먼저 이뤄지는 점을 감안하면, 이제부터 기업들의 투자가 서서히 증가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이와 관련,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최근 주요 업종별 상위 6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올해 투자 계획을 조사한 결과도 상당히 고무적이다. 이 조사에서 응답 기업들은 지난해보다 투자 규모를 17.2%나 늘려 잡은 것으로 나타났다. 무엇보다 60%가 넘는 기업들이 지난해보다 투자를 늘리겠다고 답변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경기가 살아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그 만큼 확산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 인터뷰 -삼성경제연구소 장재철 수석연구원
"하반기 '경기훈풍' 체감할 것"

"월 수입 400만원 이상의 고소득 계층이 지갑을 여는 등 소비 심리가 개선되면서 서서히 일반 서민들에게로 훈풍이 내려갈 것으로 본다. 그 시기는 아무래도 하반기부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3분기부터 내수 회복을 조심스레 전망해 온 삼성경제연구소(SERI)의 장재철 수석연구원은 경기가 본격적으로 회복되는 시점을 올 하반기로 전망했다. 이 같은 전망에는 최근 상당수 경제 전문가들도 공감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장 연구원은 연초 경기 회복의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한 배경을 두 가지로 들었다. 그 동안 경기가 너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지연됐던 소비가 늘어날 개연성이 커진 것이 첫째라면, 월 수입 400만원 이상의 고소득층이 소비를 늘리기 시작한 것이 둘째라는 것. "지난 몇 년 간 내구재 소비 사이클이 흐트러져 있었다. 물건을 사야 할 때 안 샀다는 말이다. 때문에 올해에는 가전, 의복 등을 중심으로 소비가 살아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는 또 향후 경기 회복을 이끌 다른 견인차로 정부의 종합 투자 계획과 부동산 경기 연착륙 대책 등을 거론했다. 기업과 가계의 세금 부담을 줄여 투자와 소비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정부가 얼마 전 내놓은 세법 시행령 개정안도 긍정적인 작용을 할 것으로 지적됐다. 상반기에 이 같은 정책들이 집중적으로 시행되면 하반기에 그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장 연구원은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내수 회복과 경제 성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서비스 산업에 대한 집중 투자가 절실하다는 견해도 피력했다. 제조업 부문의 일정한 영역은 수입으로 대체하고, 여기에서 남는 역량을 서비스 부문 육성으로 돌려 경쟁력을 갖춰 나가자는 것이다.



서민들은 여전히 춥다

일부 중산층과 고소득층을 중심으로 소비에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지만 서민들은 아직 겨울 추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서민들이 많이 찾는 재래 시장이나 중저가 쇼핑몰, 외식업 체인점 등의 매출 회복 조짐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증거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1월 25일 발표한 '1분기 시장 경기실사지수(MSI) 보고서'는 재래 시장 상인들이 느끼는 체감 경기가 여전히 바닥권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 부산 등 전국 7대 도시 재래 시장 상인들은 지난해 4분기보다 올 1분기가 더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나타냈다. 조사가 처음 시작된 지난해 2분기 이후 꾸준히 상승하던 MSI는 지난해 4분기 74를 기록했지만 올 1분기에는 도리어 60으로 떨어진 것이다.

젊은 층과 서민들이 의류나 가방, 액세서리를 주로 구입하는 서울 동대문의 쇼핑몰 단지도 춥기는 마찬가지였다. D쇼핑몰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기념품 가게를 하는 최지영씨(여ㆍ가명ㆍ29)는 "한류 열풍 덕에 우리 가게는 그런 대로 영업이 되지만 이곳 쇼핑몰의 주류인 옷 가게 등은 장사가 안 된다고 모두들 울상"이라며 "월세를 감당하기도 어려워 가게를 내놓는 상인들도 적지 않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외식 업계에도 경기 침체의 한파는 여전하다. 패밀리 레스토랑 체인점인 A업체의 한 관계자는 "지난 여름부터 손님들이 본격적으로 줄기 시작하면서 경기가 나쁜 것을 실감하고 있다"며 "각종 마케팅 묘안을 짜내 봤지만 매출 증가는 커녕 근근이 현상 유지를 하는 정도"라고 푸념했다.

달리는 여론 조사 기관인 택시 기사들도 내수 회복 조짐이 있느냐는 질문에 코웃음으로 반응했다. 영업용 택시를 모는 박영동(68ㆍ가명)씨는 "낮에 손님이 드문 것은 물론이고 밤에도 유흥가 같은 곳에 머물러 보지만 손님 태우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라며 "돈 많은 사람들이 소비를 늘린다고 해서 우리 같은 서민들의 수입이 늘어나느냐"고 반문했다.

김윤현 기자


입력시간 : 2005-02-02 11:16


김윤현 기자 unyon@hk.co.kr